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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문현답

누쨘

끝도 없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기분을 아는가? 땅이 사라지고 바닥없는 절벽 밑으로 떨어지는 그 기분이란 어릴 때 이후로 느끼리라 생각하지 못한 감정이었다. 이런 감정을 느끼고 싶지 않아 평소 요령 있게 살도록 노력했는데, 되려 그 때문에 내성이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푹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의 화면을 노려보았다. 
야오토메 가쿠. 나를 요즈음 괴롭게 만드는 이름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싸웠다.
함께 음악과 연기의 길을 나아가는 동료로서 싸웠는가? 아니었다.
친구들끼리 흔하게 있는 다툼인가? 
그것 또한 아니었다.

나 니카이도 야마토는 연인인 야오토메 가쿠와 싸웠다. 그것도 사귄 지 단 2주 만에 말이다. 2주 만에 싸운 걸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초조한 눈동자로 화면을 노려보던 나는 기어이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아무리 자신을 질책해도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은 나의 쓸모없음을 증명하는 듯했다.

“하….”

결국 침대에 누워 하릴없이 천장만 바라보았다. 바라보고 있자니 내 몸을 끌어당기는 것은 얼마 지나지 않은 과거의 기억이었다.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쓴맛만 나는 후회에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기억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나를 잠식했다.

*** 

“니카이도. 좋아해. 나랑 사귀자.”

나를 향해 고백을 내뱉는 야오토메 가쿠의 모습은 지극히 비현실적이었다. 나를 바라보는 그 눈은 빛을 받아 반짝이는 보석처럼 아름다웠다. 그 모습을 보고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동성끼리의 연애. 그 이름만 들어도 관계가 쉽지 않을 거란 것은 뻔했다. 나는 단 한 번도 내가 지닌 감정이 제대로 보답받으리란 기대를 하질 못했다. 빛을 보지 못한 희망은 점점 초라하게 꺼져만 가던 상태였다. 그런 와중에 받은 고백이란 벼락을 맞는 듯한 충격이었다.

“…하?”

우리는 야오토메의 집에서 단둘이 술을 마시는 중이었다. 나는 술에 취했나 싶어 컵을 내려다보았다. 내 몫으로 주어진 알코올은 단 한 방울도 사라지지 않은 채였다. 그야 그렇겠지. 단 한 입도 마시지 않았으니까. 무의식적으로 마셨나 싶었는데 역시나 아니었던 모양이다. 갈증으로 입이 타들어 갔지만, 술은 입술도 적시지 못한 채 그저 컵에 담겨 탁자에 내려놓게 되었다.

“이거 몰래카메라?”
“그럴 리가 없잖아?”
“아니…왜? 대체 왜?”

혼란스러운 머리를 정리하기 위해 이마를 짚었다. 상대를 싫어하지 않기에 이 상황은 더더욱 이해되지 않았다. 내가 아는 야오토메 가쿠는 이성애자였기 때문이다.

“너 여자 좋아하잖아?”
“그게 널 좋아하지 못할 이유는 되지 않아.”

단정히 다물린 입술. 꿰뚫을 것처럼 똑바로 날 바라보는 눈동자. 그 열렬히 타오르는 시선을 맞고 있자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멍하니 마주 보는 것밖엔 없었다. 수많은 팬이 바라보는 트리거의 야오토메 가쿠가 아닌. 그저 나만을 위해 준비된 존재 같았기 때문이다. 저도 모르게 입에 고이는 침을 삼키고 있자면 초조한 듯 재촉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래서 예스야 노야.”
“…혀… 형아는 그….”
“니카이도. 간단하게 생각해. 날 어떻게 생각해?”

야오토메는 그리 말하며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단둘만 있는 집이 아니었다간 큰일 날 모습이었다. 소파에 앉아있던 나는 점점 뒤로 물러났지만, 그보다 가까이 오는 게 빨랐다. 나는 도망갈 길 없는 사냥감이었다. 그것도 편하게 잡수시라고 배를 드러낸 사냥감. 결국 어찌할 바 없이 그의 팔 안에 갇히고 말았다.

“그…야….”
“응?”

신이시여 대체 왜 저 녀석에게 저런 얼굴을….
눈앞에서 보석이 번쩍이는데 손을 뻗지 않을 자가 있겠는가? 내 입은 저 혼자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믿지도 않는 신에게 불평하는 것을 보자면 제정신이 아니었다.

“좋지….”
“진짜냐!”
“어… 어어…좋지, 좋고말고”
“좋았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하늘을 향해 몇 번이고 뻗은 그는 이내 강한 힘으로 날 끌어안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그 느낌이 옷 너머로도 느껴졌다. 뜨거운 불이 나를 안은 것처럼 내 몸이 달아올랐다. 숨을 들이켜면 잔향으로만 느낄 수 있던 향이 폐부까지 들어찬다. 
아 현실이구나.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간다. 마치 몸이 풍선이 되어 날아가는 듯했다. 하지만 부풀면 부풀수록 풍선은 터지기 마련이고 터져 쏟아진 불안은 나를 금방 잠식했다. 내보일 수 없는 부끄럽고 추한 고민은 안으로 곪아갔다. 시간을 내어 중간에 만나거나 때로 전화를 해 사랑을 나눌 때도 그 고민은 사라지긴커녕 점점 몸뚱이를 크게 키웠다. 기쁨과 수심이 뒤섞인 채 혼자 촬영장에서 옷을 갈아입을 때 문을 열고 야오토메가 나타났다.

“여어.”

마치 옆집에 놀러 온 것처럼 태연한 모습이었지만 그가 얼마나 바쁜지 알고 있었다. 일부러 시간을 내어 찾아온 것이겠지. 연인을 찾아와 근사하게 씩 웃는 야오토메의 얼굴은 누구나 홀릴 정도로 근사했다. 저도 모르게 생각을 잊게 만드는 것에는 최고의 도움이 되었다. 그는 대기실에 나 혼자 있는 것을 알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 틈에 허리에 두를 셔츠를 찾아 두리번거릴 때였다. 

“잡지 촬영으로 입은 거냐?”
“응. 전에 말했던 여성지… 흐아악?!”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던 야오토메는 손을 불쑥 내밀어 내 엉덩이를 쓱 쥐었다. 잡지의 촬영을 위해 약간 달라붙는 청바지를 입고 있던 탓에 그 손길이 너무 선명했다. 대비하지 못한 충격에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뭐, 뭐, 뭐, 뭐 하는 짓이야!”
“아니. 엉덩이가 커서 나도 모르게.”
“뭐!?”

손을 보며 쥐었다 피는 녀석의 모습은 파렴치한 변태 그 자체였다. 그렇다기엔 얼굴에 음욕이 없어 정말 내 엉덩이가 큰 것이 신기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어지는 야오토메의 말은 나를 심란하게 하기엔 충분했다.

“너 엉덩이가 여자 같구나.”
“….”

얼굴이 타오를 듯 벌게지는 것이 느껴진다.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나는 허겁지겁 원래 두르려고 했던 체크무늬 셔츠를 허리에 묶으며 뒤로 물러났다. 마치 꼬리에 불이라도 붙은 것 같았다. 

“여자 같다니… 그, 그럼 여자나 만나지 그래?”
“하?”
“여자 같은 엉덩이 가진 남자보단 여자가 나을 거 아니야.”

혀는 저도 모르게 날카롭게 비수가 되었다.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 앞을 바라보자 두 눈을 부릅뜨고 뚫어져라 바라보는 야오토메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머리를 큰 망치로 두들겨 맞은 듯한 모습에 내 마음속 한켠이 쿵 하고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뱉은 말은 깃털처럼 가벼워 다시는 주워 담을 수 없는 법이었다.

“야, 야오….”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한 거냐?”
“…….”
“내가 여자를 만나는 게 좋다고?”
“맞잖아. 너 같은 녀석이 뭐가 좋다고 날 만나는 건데?”

입을 다물려 해도 한번 터진 입은 그동안 속에 담아왔던 말을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누군가 쥐어짜는 것처럼 튀어나오는 말들은 일그러지고 구부러져 누군가에게 보일 수 없을 만큼 처참했다.

“왜 지금 보니까 후회돼? 이런 별 볼 일 없는 남자란 걸 알아서?”
“니카이도.”
“알면 지금이라도….”
“니카이도!”

나를 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칼날처럼 차갑고 돌덩이처럼 무거운 시선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저 처형을 기다리는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어떤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을까? 아까처럼 충격받은 얼굴일까? 손으로 턱이 부서질 것처럼 세게 틀어쥔 채 발끝만을 바라보았다. 

“후회할 짓 하지 마.”
“…….”
“나는….”

무언가 다짐하듯 말하는 그의 말을 방해하는 것은 핸드폰 벨 소리였다. 혀 차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보니 확실히 불청객임이 분명했다. 아무래도 일에 관련된 연락이겠지. 나는 새도 떨어트릴 인기를 구가하는 아이돌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젠장. 니카이도! 연락할 테니 받아!”
“…….”

고개 들지 않는 나를 두고 야오토메는 떠났다. 턱 막힌 숨을 내뱉고 나는 고개를 들었다. 대기실을 가득 메우던 존재감을 뿜던 존재는 없었다. 떠난 것을 알았음에도 주변을 살핀 것은 왜일까. 시선을 돌리는 시야에 잡힌 것은 거울에 비친 나 자신이었다. 잔뜩 일그러진 표정. 후회일까 슬픔일까.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혼란스러운… 못난 표정이었다.



눈을 떴다. 익숙한 기숙사 천장이 보였다. 이제는 태어나 자란 친가보다 편안한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침대에 송곳이 마구 튀어나와 있는 듯 괴로웠다.

“….”

다시 한번 핸드폰의 화면을 킨다. 그동안 나에게 꾸준히 연락한 야오토메의 흔적이 보였다. 부재중 전화는 그의 노력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와 동시에 내가 보인 도주의 횟수이기도 했다. 사람을 대하는 데에 성실한 그의 모습은 지향점으로 삼을 만큼 대단했으나, 지금만큼은 나를 질타하는 매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 괴로움에도 도저히 연락할 수 없었다. 그날 내뱉은 말에 벌거벗겨진 듯 수치스러웠고 또다시 마주하면 똑같이 될까 두려웠다.
길거리에 발가벗겨진 듯한 수치가 나를 찔러댔다. 몇 년이 지났음에도 난 또다시 회피하고 있었다. 또다시 가장 싫어하는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끔찍한 감각이었다. 누군가가 등을 떠밀어주는 기분에 핸드폰을 쥐어 잡는다. 손끝이 파르르 떨리는 것은 내가 제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대론….”

석고상처럼 굳은 손가락을 움직여 리다이얼 버튼을 눌렀다. 뚜르르 가는 신호음은 초조하게 내 심장을 쥐어왔다. 받았으면. 받지 않았으면. 양가적인 감정으로 얼마나 기다렸을까. 신호음이 끊기고 사람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발소리만 들려도 누구인지 알 수 있다고 한다. 나 또한 그랬기에. 그저 단순한 기척이나 숨소리만으로도 전화기 너머의 존재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물론. 애초에 야오토메의 핸드폰으로 건 거니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 받았다면 이상했겠지만 말이다.
“야오토메. 미안해 내가….”
“….”
“내가 겁이… 겁이 많아서….”

말을 하려 했으나 절로 목이 메 그저 침을 삼키고 있을 때 핸드폰 너머로 한숨 섞인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니카이도. 문 열어줘.”
“뭐?”

퉁. 가볍게 무언가가 방문을 쳤다. 손으로 약하게 친 듯한 소리.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문을 바라보고 있자 재촉하듯이 문을 다시 퉁 하고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니카이도….”

굳어있던 몸이 놀라울 정도로 쉽게 움직였다.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자 그곳에는 그동안 가장 보고 싶었던. 그리고 보고 싶지 않았던 이의 얼굴이 있었다. 그는 문이 열리자마자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와 나를 바라보았다. 전화를 끊고 가만히 보던 그는 덥석 나를 끌어안았다.

“연락한다고 했잖아. 왜 안 받아?”
“아, 그, 그게….”
“걱정했잖아!”

작게 소리친 그는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문지른 뒤 깊게 숨을 들이켰다. 언젠가의 내 모습과 겹쳐져 나는 그저 야오토메의 몸을 마주 안을 수밖에는 없었다. 그동안의 쌓인 대화는 잊고 싶을 만큼 편안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모든 시간에는 끝이 있는 법이었다. 한참이 지난 뒤 나를 제 몸에서 떨어트린 야오토메는 잔뜩 성이 난 상태였다. 그런 표정마저도 근사해 나는 속으로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그땐 미안했어.”
“….”
“나는 그냥 네 엉덩이가 커서 말했을 뿐이야. 그 이상 그 이하의 뜻은 없어.”

모든 감성을 다 깨부수는 녀석의 발언에 나는 이마를 짚었다.

“그놈의 엉덩이….”
“물론 내심 엉덩이가 커서 좋기도 했지만.”
“엉덩이. 엉덩이 좀 그만해줄래!? 형아, 부끄러우니까!”

정강이를 때려버리고 싶은 것을 참은 채 나는 비실거리며 침대에 주저앉았다. 그래. 그는 이런 남자였지. 어딘지 맥이 빠지는 듯한 느낌에 길게 한숨을 내쉬고 얼굴을 양손으로 쓸어내렸다. 

“니카이도.”
“…왜.”
“그래서 너는 뭐가 문젠데?”
“하?”
“그렇게 말한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
“진짜로 내가 너와 헤어지고 다른 여자를 만났으면 좋겠다는 건 아니지?”
“그럴 리…!”

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의 오해를 정정해주기 위함이었다. 내가 함부로 내뱉은 방어적인 말을 믿지 않았으면 했다.
그리고 그제야 마주 볼 수 있었다. 그날. 그때. 나를 바라보았던 야오토메 가쿠의 얼굴을.
언제나 당당하게 빛나던 회색의 눈동자는 느리게 흔들리고 있었다. 희망과 슬픔이 뒤섞인 듯한 괴로운 눈빛이었다. 내가 그리도 좋아하던 빛이 나 때문에 뒤흔들리고 있었다. 
그럴 순 없었다. 그에게 도움이 되지 못할지언정 방해가 되지 말아야지. 그것만큼은 있어서는 안 됐다.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럼 왜 그렇게 말한 건데? 네가 그렇게 생각하니까 말한 거 아니야?”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더는 도망칠 수 없었다. 야오토메를 위해서라도 속에 있는 것을 내뱉어야만 했다.

“나는… 자신이 없어. 생각해봐 야오토메. 난… 니카이도 야마토라고.”
“알고 있어.”
“아니. 넌 모르고 있어.”

나는 얼굴을 반쯤 쥔 채 눈동자만 굴려 그를 올려다보았다. 자신과는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으나, 전혀 다른 다이아몬드 같은 생을 구가하는 남자. 그 어떤 시련도 그에겐 그저 언젠가 딛고 나아갈 발판이 될 뿐이었다. 때때로 도망쳤던 자신과는 전혀 다른 남자. 언젠가는 질투했으며, 두려워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찬란히 빛나는 남자였다.

“난 어딜 가서 내보일 수 없는 애인이야. 출신도 별로고 같은 성별에. 너에 비하면 잘생기지도 예쁘지도 않아. 몸이 가늘지도 않아서 어딜 안아도 딱딱해.”

내가 남자인 것은 헷갈릴 수 없는 명제였다. 입 밖으로 내가 선택받아야 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말하는 것은 즐겁지 않았다. 

“심지어 성격도… 이렇고 말이야. 솔직하지도 않고 애교도 없고….”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에게 선택받아야 할 이유를 생각해낼 수도 없었다. 
나는 언젠가 끝이 날 관계 위에 서 있었다. 야오토메가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있게 되면 떨어질 관계. 잡고 있던 손을 놓으면 염치없게 붙잡아서는 안 되는. 
말하면 할수록 내 목소리는 줄어들었다. 결국 나는 그를 올려다보는 시선을 다시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도저히 나를 보는 그 시선을 견딜 수가 없었다. 

“니카이도. 고작 그런 거로 고민했던 거야?”

하지만 내 머리 위로 허탈한 목소리가 떨어져 내렸다. 내가 고개를 들기도 전 뜨거운 체온이 나를 감싸 안았다. 그는 강한 힘으로 나를 다시 끌어안았다. 

“너 바보냐? 내가 너를 그 정도로 모르고 좋아한다고 했을 것 같아?”
“….”
“네가 그런 성격인 것은 몇 년 전부터 알고 있었어. 하지만 그게 뭐 어때서?”
“…….”

그는 팔을 풀고 내 앞에 무릎 꿇어앉았다. 양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 쥐어 들어 올리는 손이 다정했다. 나를 향해 쏟아지는 애정어린 눈빛이 부끄러울 정도로 달콤했다. 

“나는 그런 네가 좋다고 한 거야.”
“….”
“솔직하지 못한 네가 견디지 못하도록 귀엽고. 나와 함께 있으면 긴장해서 굳은 몸이 사랑스러워.”
“…너 그런 말 아무렇지도 않게 하네.”
“연인한테 하는 말인데 당연하지. 그리고 내보일 수 있는 연인 같은 건 바란 적도 없었어. 누가 애인을 자랑하려고 데리고 다녀? 나는 너와 함께 있고 싶어서 고백한 거야.”
“진짜 부끄러운 말 잘한다니까.”
“뭐야. 불만이냐?”

고작 말 한마디. 그 한마디만으로도 내 불안은 눈처럼 살살 녹아내렸다. 이런 조건 없는 애정을 바랐던 걸까? 저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눈물을 닦으려 했으나 그보다 야오토메가 빨랐다. 하얀 손이 내 뺨을 어루만지며 눈가를 닦아 내었다. 가까이에서 본 그의 얼굴은 은으로 빚어 만든 듯 아름다웠다. 하얀색으로 빛나는 촘촘한 속눈썹이 마치 나비의 날개 같았다. 

“과연 안기고 싶은 남자 1위였던 남자.”
“그거랑 이거랑 무슨 상관인데?”
“아무것도.”

퉁명스럽게 입술을 비죽거리는 야오토메의 얼굴은 답지 않게 귀여웠다.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린 나는 내 얼굴을 슬며시 잡은 손에 손을 올렸다. 닿아오는 체온이 따뜻해 안온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그래서. 아무것도 안 할 거야?”
“하?”
“오랜만에 만난 애인에게 아무것도 안 할 셈?”

견딜 수 없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뺨에 닿아오는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에 나는 하하 웃고 말았다. 그 체중이 내 몸에 실려 침대에 눕혀지고도 계속.
드디어. 제대로 된 연애가 시작된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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