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집 데이트
라세
야오토메 가쿠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한 치의 망설임이 없는 남자였다.
아이돌이라는 것은, 결국 따지고 보면 가판대에 자기 자신을 걸어놓는 것과 다름없는 행위이다. 연예계 프로덕션의 사장을 친아버지로 둔 탓에 가쿠는 화려한 무대와 장막 뒤의 어두운 세계를 철이 들기도 전에 알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스테이지 위에서 관객의 환호에 둘러싸여 노래를 부르던 가수가 일간지의 찌라시 기사 때문에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쓴 채 카메라 앞에 서고, 몇 개나 되는 드라마에 출현해 전국민이 얼굴을 알고 있다는 배우도 신원을 밝힐 수 없다는 관계인의 제보 때문에 방송계에 다시는 얼굴을 들이밀지 못 하는 경우도 있었다.
눈부신 조명과 화려한 배경 덕택에 알아채지 못 할 때가 많지만, 이 세계는 면도날 위에 세워져있다. 발을 삐끗하는 순간 자신을 비추던 스포트라이트는 멀어져가고, 그 빈자리는 스토커나 다름없는 3류기자가 써내려간 근거없는 기사로 채워진다. 자신의 실수로 넘어진 것이든, 남이 모른체 내민 발목에 걸려 넘어진 것이든 사람들은 알아주지 않는다. 뒷전으로 밀려난 이들에게까지 신경을 써주기엔 무대에 발을 들여놓고 싶어하는 별들이 너무 많았다.
카메라에 얼굴을 내밀 때에는 적당히 가면을 쓰는 것이 서로에게 좋은 일이다. 그것이 불문율이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예쁘게 포장된 상품을 진열해놓아야 손님들이 만족하고 가격을 지불하는 것이다. 전부를 드러내는 것은 연예계에 갓 발을 디딘 초짜나 자기관리를 할 줄 모르는 하수나 선택하는 길이다. 무대 뒷편의 이야기에게까지 관심을 갖는 관객은 없다.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만 그럴싸하다면 속내에는 무엇을 감추어도 아는 사람이 없다. 궁금해 하는 사람도 없다. 그러니 자기 자신을 가판대에 걸어놔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어차피 그것은 시장이 요구하는 허상에 불과함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오토메 가쿠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한 치의 망설임이 없는 남자였다. 마음을 다 해 팬과 관객을 믿었고, 자신들을 응원해주는 이들에게 진심을 보여주는 것을 서슴치 않았다. 사람들에게 베푼 믿음과 애정이 반드시 돌아오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아이돌Idol이라는 것은-사실 우상이라는 것의 정의가 그렇지 않은가.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꿈이라고 생각한 것을 그들은 당연스럽게 해낸다. 동화책 속에서나 나올법한 꿈결같은 이야기를 보여주기 때문에 정상에 설 수 있었다. 숨김 없이 대한다면 팬들은 그만큼의 애정으로 보답해줄 것이라고, 트리거는-야오토메 가쿠는 언제나 그렇게 믿으며 무대에 서는 것이다.
"그래서 진심을 낸 결과가 이거야?"
"뭐가 문제인데?"
"아니, 나도 꽃이라던가 하트모양으로 늘어놓은 향초라던가 리본에 싸인 샴페인같은건 바라지도 않고 준비하지도 않았어. 그래도 너희 집에 처음 왔는데? 맨날 남들이 안 볼 때 슬쩍 손 잡아보거나 룸에서 술먹거나 호텔에서 꽁냥거리다가 처음으로 연인의 집에서 외박♡ 방해꾼 없는 두근두근 하룻밤♡이라고? 이렇게 날것 그대로인 집이 아니라 뭔가 특별한게 있어도 좋지 않아???"
"청소 깨끗하게 잘 하고 손님방에 물건 채워넣고 같이 먹을 야식도 준비했는데 또 뭐가 부족하다는 거지?"
"⋯내가 이거 잡지에 제보하면 당장에 안기남 1위 타이틀 내려놔야 하는거 알고 하는 소리지?"
야마토는 한숨을 내뱉으며 양 손에 들린 편의점 비닐봉투를 가쿠에게 떠넘겼다. 500ml 맥주캔으로 가득 찬 얇은 비닐봉지의 손잡이가 손바닥을 파고들어 야마토는 한시라도 빨리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발뒤꿈치로 신발을 대충 벗고 현관에 내팽개친 채 맨발로 거실바닥을 밟는다.
진심을 냈다는 말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던 것처럼 가쿠의 스위트 홈은 과연 깔끔했다.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한 바닥과 쓸데없는 가구는 하나도 없는 넓은 실내, 무채색으로 통일된 미감을 자랑하는 집은 트리거의 리더가 머무는 곳으로써 손색이 없었다.
이 깨끗하고 넓은 거실바닥에 맥주 빈 캔과 과자봉지가 굴러다닐 생각을 하니 양심이 콕콕 찔렸다. 그렇지만 성인 남성 둘이 야밤에 만난다면 술잔을 기울이며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이 국룰 아닌가. 연인다운 행위는 그 다음에 해도 좋았다. 우선은 출출한 배를 알콜과 탄수화물로 채우는 것이 먼저였다.
가쿠는 야마토에게서 받아든 맥주들을 차곡차곡 냉장고와 냉동실에 정리해 쌓고 있었다. 가까운 편의점에서 산 것이라고는 하지만 여름밤의 후덥지근한 바람에 알루미늄 캔의 표면에 물방울이 잔뜩 맺혀있기 때문이었다. 어깨 너머로 슬쩍 본 냉장고 선반에는 방문선물이랍시고 자신이 들고 온 맥주를 제외한 알콜은 보이지 않았다. 편의점에서부터 팔이 빠져라 무거운 봉투를 들고 걸어오면서 이 수많은 맥주를 둘이서 다 마실 수 있을까, 절반 정도는 그냥 반품해버릴까 하는 욕망에 휩싸였지만 굴하지 않고 전부 안고 온 것이 옳은 선택이었다. 술과 안주는 다다익선이었으니까.
"아, 안주는 간단한 것도 괜찮지? 편의점이라 대단한게 없어서."
"그래. 밤도 깊었으니까."
집주인의 허락도 받았겠다 야마토는 룰루랄라 가방 안에서 봉지과자를 꺼내기 시작했다. 자고로 맥주 안주로는 짭짤하고 기름진 것이 최고였다. 소금과 시즈닝이 잔뜩 뿌려진 감자칩 같은 것들 말이다. 콘소메맛, 와사비맛, 고추장맛, 편의점표 과자가 테이블을 메워가는 것을 만족스러운 눈으로 보고 있는데 가쿠가 멋스러운 원목도마와 젓가락 두 벌을 들고 왔다. 야마토가 손에 들린 봉지과자와 도마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너 혹시 봉지에서 손으로 직접 과자를 꺼내먹을 수는 없으니 여기에 담아서 젓가락으로 먹겠다는건⋯?"
가쿠는 대답할 필요도 못 느끼겠다는 듯 가볍게 코웃음치고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냉기와 함께 금박은박으로 마무리 된 커다란 종이상자가 여럿 나왔다. 백화점에서나 볼법한 포장을 벗기자 먹음직스러운 안주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가쿠는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게 젓가락으로 하나씩 집어올려 접시 위에 줄을 맞춰 올려놓았다.
그 진중한 모습에 결국 야마토는 뜯지 않은 과자들을 손으로 쓸어 바닥에 밀어놓은 뒤 가쿠와 함께 젓가락을 들었다. 손님의 배를 부르게 하는 것이 집주인의 의무라고는 하지만 알콜과 과자로 배를 채울 생각이 만만이었던 자신과는 달리 가쿠는 정말 제대로 대접할 생각인것 같았다.
원목도마와 고급스러운 사각 접시에 안주거리들이 하나 둘 놓여졌다. 맥주 뿐만이 아니라 와인이나 사케와 함께 페어링해도 괜찮을 법한 메뉴였다. 모듬 숙성회, 큐브 치즈, 선드라이 토마토와 바질이 올라간 부르스게타, 연어회나 캐비어 따위로 장식된 카나페에선 평소에 기숙사 냉장고를 뒤져 주워먹던 것들에서 찾아볼 수 없는 고급스러움이 풍겼다.
"역시 야오토메 주니어⋯ 평소에는 이런 것들을 먹고 사는군."
"아네사기에게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야식을 추천해달라고 했더니 선물받은 거다."
"혼자 사는 친구가 놀러온다고 하니 감격해서 사온거 아니고?"
"바보냐! 누가 그런 것까지 말을 해?!"
투닥거리며 언성을 높이는 와중에도 부지런히 젓가락을 놀리며 세팅하다 보니 이내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주안상이 차려졌다. 가쿠가 종이박스를 싱크대에 대충 치워놓는 동안 야마토가 냉동실 문을 열어 꽝꽝 언 캔맥주를 꺼냈다. 마치 기숙사 냉장고를 여는 것 같은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캔을 뜯고 넘쳐흐르는 거품에 입을 대어 곧바로 마신다. 살얼음이 낀 것 같은 차가운 맥주가 목구멍을 넘어가니 드디어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빈 속에 알콜이 채워지고 온 몸이 짜르르하게 울리자 기분 좋은 고양감이 발끝부터 차곡차곡 채워졌다.
"손님에게 냉장고 문을 열게 하다니 호스트 실격이라구."
어느새 한 캔을 절반 정도 비워버린 야마토는 낄낄거리며 냉동실에 쌓아두었던 맥주캔을 2개 더 꺼내어 옆구리에 끼웠다. 살에 직접적으로 와닿는 냉기에 눈썹을 찌푸리기도 전에 커다란 손이 맥주캔을 가져간다.
"곧 손님이 아니게 될 테니까 괜찮다. 자주 올거잖아?"
와, 역시 안기남. 순식간에 손이 비어버린 야마토는 홀린듯 가쿠의 뒤를 따라가 소파에 앉았다. 뚜껑을 따지 않은 캔이 각자의 앞에 놓이고, 마시던 맥주로 건배를 하고 싶지 않았던 야마토는 술상을 눈앞에 두고 손 안의 맥주를 꿀떡꿀떡 마셨다. 여름밤이라 그런지 안주가 없어도 술이 술술 넘어간다.
"음, 근데 평소에 먹던거랑 너무 달라서⋯ 맥주에는 튀김이나 과자가 최고인데."
"이 밤에 염도높고 기름진걸 먹겠다는 뜻이야? 며칠 뒤면 방송이 있는데?"
"야밤에 맥주나 축내는 아저씨라서 미안하게 됐네요??"
기껏 청소해둔 집이 더러워지면 안 될 것 같아 테이블 위에 빈 캔을 가지런히 쌓아두려고 했는데, 주정뱅이 아저씨를 무시하는 발언을 한 야오토메 주니어에게 내일 방바닥을 닦아야 하는 형벌을 내려야겠다고 결심한 야마토는 다 마셔버린 맥주캔을 바닥에 아무렇게나 굴리며 새로운 캔을 땄다. 감미로운 황금색 액체를 입에 들이대려는 찰나 눈 앞에 다른 캔이 들이밀어졌다.
"건배."
"⋯⋯."
"왜. 새 캔으로 건배하고 싶어서 처음에 땄던거 무리해서 마셨잖아."
"⋯뭐어, 그건 그렇지."
못 이기는 척 내밀어진 캔을 소리나게 쳤다. 얼굴이 붉어져서 열기를 식혀줄 시원한 것이 필요했다. 가쿠가 몇 모금 마시고 내려놓은 것에 비해 자신은 캔을 자꾸 기울이고 있다. 결국 두번째 캔도 절반을 넘게 비워버린 뒤에야 손이 멈췄다. 멀끔한 얼굴은 아직 취기가 올라오지 않아 창백하리만큼 희었고, 자신의 뺨은 그와 대비되게 옅게 홍조가 올라오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두 사람의 얼굴색이 비슷해질 것을 상상하니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너도 나처럼 밤마다 맥주를 홀짝이는 아저씨로 만들어 줄테니까 각오해. ⋯앞으로, 자주 올거니까⋯⋯."
실실 웃음을 흘리며 차가운 맥주 캔을 만지작거렸다. 오늘따라 술이 달다. 젓가락을 집어드는 대신 물방울이 맺힌 표면을 괜히 손가락으로 덧그려본다. 각양각색의 주안상은 가쿠가 공들여서 준비했을 것이 분명한데, 아니 오히려 신경을 써서 차려놓은 것들이라 그런지 손을 댈 생각이 들지 않는다. 테이블을 빼곡하게 메우고 있는 접시들을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른 것 같다.
대화 사이사이에 있을 수도 있는 자연스러운 침묵. 손에 들린 캔맥주도 안주가 잔뜩 쌓인 테이블도 분명 평소와 똑같을 터인데 자꾸 눈치를 보게 된다. 밖에서 만날 때는 의식하지 않았는데, 둘만 있는 작은 공간이다 보니 사운드가 비는 순간 어색함이 넘쳐 흘렀다. 호텔에서 만날 때야 애초에 목적이 있었으니 신경쓰지 않았지만 이 곳은 가쿠가 살고 있는 집이었다. 맥주 1캔에 벌써부터 이성을 놓아버리고 마음 가는 대로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니카이도."
그런데 집주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나 보다. 테이블에 정갈하게 차려진 음식들에 손도 대지 않았는데 다른 것에 먼저 손을 대려고 한다. 왜, 왜 벌써 그런 분위기야? 우리 만난지 몇 분이나 됐다고?? 점점 다가오는 가쿠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려 야마토는 황급히 고개를 빼며 필사적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화제를 돌릴만한 것, 뭔가 새로운 것, 최소한 시간을 끌 수 있는것!! 아직은 너무 이르다고 이 도련님아!!!
그런 노력이 가상하여 야마토는 소파 구석에 놓여있는 리모컨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그래! 우리 TV나 볼까!! 그동안 스케쥴이 바빠서 기숙사에 들어가기만 하면 잠자기 바빴거든!! 모니터링 좀 해야지!!"
하루 일을 마치고 저녁을 같이 먹은 가족이 삼삼오오 거실에 둘러앉아 TV를 볼 시간이었다. 시청자를 잡기 위해 어느 채널을 봐도 재미있는 방송을 하고 있을 것이다. 적어도 이런 분위기를 이어가는 것보단 낫겠지. 팔꿈치로 자신을 밀어대는 통에 대놓고 실망한 기색을 띄는 가쿠를 무시하며 자리를 고쳐 앉은 야마토가 TV 전원을 켰다.
그리고 니카이도 야마토는 아이돌의 파급력에 대해 얕보고 있었다.
전원을 켜자마자 아이나나의 무대가 시야를 가득 메워서 기겁을 하며 채널을 돌렸는데—"뭐야 왜 돌려 그냥 보지" "방금 전까지 얼굴 맞대고 같이 있었다고! 너같으면 동료들이 보고 있는데 면전에서 달라붙어 있고 싶냐?" "아 그건 좀"—, 리모컨 버튼을 누를 때마다 익숙한 얼굴이 튀어나왔다. 푸딩파르페를 간판으로 내세운 디저트집을 소개하는 멧조를 피해 채널을 옮기자 새로 런칭한 드라마에서 여주에게 덤벨 쓰는 법을 알려주는 헬스 트레이너 류노스케가 나왔다. 그 다음은 푹신한 소파에 앉아 서로 달링을 외쳐대는 리바레가 진행하는 토크쇼였고, 그 다음은 팔이 빠져라 거품기를 휘저으며 유명 제과점의 레몬머랭케이크 레시피를 재현하는 미츠키와 나기가 게스트로 나오는 요리방송이었다.
그 트리거나 리바레와 동시간대의 방송에 계속해서 얼굴을 비출 수 있다니, 우리들 정말 잘 나가는 아이돌이 맞구나⋯? 야마토는 마음 속으로 얼떨떨한 감탄사를 내뱉으면서도 리모컨의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몇 십개나 되는 프로그램을 탐방하는 와중에 처음 보았던 스테이지에서 트리거가 공연을 하는 것이 화면에 비춰졌다. 시간이 흘러 무대 위의 출연자가 바뀌었고, 결국 티비 프로그램 전체를 한 바퀴 빙 둘러서 본 것이다. 이 이상 채널을 돌려봤자 멤버들이 떠들어대는 방송 밖에는 볼 것이 없다.
과연 명불허전 트리거. 노래는 언제나처럼 완벽했고 퍼포먼스도 좋았다. 단 하나 문제점이 있다면, 역시 화면 이쪽에 있는 관객이겠지? 평소에 자신이 등장한 프로그램을 모니터링하는 것에 기꺼움이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었지만 때를 영 못 맞췄다. 야마토는 손에 들린 맥주 캔보다 차갑게 식어가는 분위기를 느꼈지만 차마 리모컨을 내려놓지도 못 하고 멍하니 화면만을 응시했다.
가쿠의 눈썹이 하늘 높이 치솟고 무대는 절정으로 치달았다. 그리고 마지막에 센터의 소악마가 검지손가락을 곧게 펴 입술에 가져다대며, 고개를 가볍게 기울여 객석의 관람객들을 향해 윙크했다. 실로 천사라 일컬어 부족함이 없을 모습이지만 한쪽 벽을 꽉 채운 HDTV의 화면으로 보기에는 파괴력이 강했다. 그러니까, 연인과의 다정한 시간을 방해한 저 천사의 실제모습을 알고 있는 야오토메 가쿠의 인내심을 파괴하기에 충분했다는 뜻이다.
"무슨 방송이 이렇게 볼 게 없어!!"
그렇게 볼 것이 없는 방송을 만드는데 크게 일조한 가쿠는 야마토의 손에서 리모콘을 빼앗아 전원 버튼을 눌러 화면이 암전된 것을 확인한 뒤 리모콘을 저 멀리 던져버렸다. 소파의 푹신한 쿠션 위로 내동댕이쳐진 리모콘이 그대로 튀어올라 거실 한 구석에 처박혔다. 아무리 생각해도 TV를 또 트는건 정말로 무리겠지?? 야마토는 가쿠의 빈 손에 억지로 캔을 쥐어주었다. 맥주가 고픈 상황이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같이 들이켜봐야 터져나오는 웃음과 함께 거실바닥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을것이 뻔했다.
"아하하핫, 이래서야 방송국에서 데이트 하는 것과 진배 없네!!"
"진배 없으면 안 되지!! 내가 오늘을 얼마나⋯"
소파에 엎어져서 끅끅거리던 야마토는 갑작스레 작아진 가쿠의 목소리에 눈꼬리에 눈물을 매단 채로 일어났다. 가쿠는 미간의 주름을 펴지 않은 채 말없이 맥주캔을 비우고 있었다. 손님이 온다고 나름 이것저것 준비했을 집주인이 시무룩해져 맥주만 홀짝거리는 꼴을 보고 있자니 측은지심이 들었다. 야마토는 가쿠의 수그러든 어깨에 팔을 얹으며 맥주캔을 강제로 가져다댔다.
"왜 그러고 있어. 맛있는 술이랑 안주가 울고 있잖아. 얼른 먹어주라고."
알루미늄 캔이 부딪치며 경쾌한 소리가 났다. 텅 빈 소리가 울리는 것을 보니 그새 다 마시고 거의 빈 캔이 된 것 같다. 당장이라도 냉장고에서 차가운 맥주를 꺼내고 싶었지만 지금 야마토는 가쿠의 곁에 달라붙어 있는 것을 원했다. 에어컨이 틀어진 실내는 약간 쌀쌀했고 겨울생인 야마토는 추위를 잘 타는 편이었다. 여름생인 가쿠는 체온이 높았고 그래서 옆구리에 붙으면 따끈따끈한 온기가 느껴져서 딱 좋았다.
야마토는 가쿠의 모든 것이 좋았지만 그중에서 특히 얼굴을 좋아했다. 이렇게 옆모습을 가까이에서 볼 기회가 많지 않아서 더 그렇다. 보통 데이트를 한다고 같은 공간에 있으면 가쿠는 자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곤 했으니까. 베일 것 같은 완벽한 콧날에 시선을 뺏겨 여태 대답이 없다는 사실도 반 쯤 잊고 있었다. 야마토는 얼마 남지 않아 찰랑거리는 맥주를 내려놓고 가쿠의 얼굴을 잘 볼 수 있도록 좀 더 옆으로 돌아앉았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리고 있자니 가쿠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집에선 좋은 기억만 주고 싶다. 맛있는 술이나 멋진 야경 같은. 완벽한 코스를 고민했지. 가족이나 동료가 아닌 다른 사람을 들이는 것은 처음이니까."
야오토메 가쿠는 그런 것에 신경쓸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매사 당당하고 행동에 거리낌이 없어서 자신을 거침없이 내보일 줄만 아는, 데이트 코스야 잘 짜지만 집안일에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 도련님일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생각을 해봤어. 너와 같이 뭘 해야 좋을지. 분명 네가 맥주를 들고 올테니 같이 먹을만한게 있으면 좋을것 같아서 아네사기에게 상담했다.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남자 혼자 사는 집이 다 거기서 거기라는 느낌을 주고 싶지 않아서 청소도 했다."
하지만 현관문을 열자마자 깨끗하고 좋은 집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했고, 먹을 것을 차리느라 부엌과 거실을 왔다갔다 할 때 먼지 한 톨 없는 실내를 보고 평소에도 관리를 잘 한다고 느꼈다. 로봇청소기인 무사시가 방을 돌아다니는 것 말고는 기숙사 공용공간의 청소는 신경쓰지 않는 자신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왜 그렇게 정성을 들였어? 어차피 술 마시고 놀거잖아."
"그야 당연하지. 내일 문을 열고 나서자마자 또 오고 싶은 집이라고 생각하게 만들고 싶었으니까."
자신을 거리낌 없이 드러낸다는 것은 평소의 모습에 자신이 있다는 뜻이다. 그야 물론 가쿠는 외면이고 내면이고 언제나 항상 멋지고 책잡을 것도 없다. 애인이 집에 놀러온다고 냉장고 안을 맛있는 것으로 가득 채우고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얼룩을 닦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는 뜻이다. 30초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지금은 혼자 살기에는 넓은 집의 청소를 마친 뒤 뿌듯한 얼굴로 이마의 땀을 훔치는 가쿠의 모습이 눈 앞에 떠오를 듯 생생했다.
"이봐, 야오토메. 오늘을 기대한건 너 뿐만이 아니야. 그동안은 남들의 눈이 있는 곳에서만 같이 있었잖아. 물론 호텔에서 즐긴 적도 있지만, 그건 경우가 좀 다르고."
사실 며칠 전부터 야마토도 몇 가지 고민을 했다.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가는 것이 아니라 한 병에 몇만엔 정도 하는 와인을 사들고 가서 분위기를 잡으며 마시는 것이 낫지 않을지, 마치 옆집에 놀러가는 것 같은 편한 차림이 아니라 옷장을 뒤집어 엎어 몇 시간이나 거울 앞에 서서 신경썼지만 신경쓰지 않은 듯 세련된 옷을 입고 가는 것이 더 좋지 않을지. 애인에게 조금이라도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같지 않겠는가.
"빨리 오고 싶었어. 가족이나 동료 말고는 아무에게도 허락되지 않은 공간에 첫 발을 디디고 싶었다고. 너를 우리 기숙사에 데려올 수는 없으니까."
가쿠가 집에 놀러오라고 넌지시 말을 건넨건 몇 주일 전이었다. 연예계에 몸을 담고 있는 이상 서로 스케쥴을 맞춰봐야 하기에 부러 넉넉하게 기간을 잡고 약속을 한 것이다. 그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야오토메 가쿠는 니카이도 야마토에게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어서 여러가지를 고민했을 것이다. 자신 못지 않게. 야마토는 그 사실이 기분 좋았다.
"그리고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다는건⋯ 남의 눈을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는 거잖아. 이렇게 손을 잡아도 괜찮고."
가쿠의 등에 왼팔을 두른 채로 야마토의 오른손이 가쿠의 왼손을 잡았다. 손가락이 서로 얽혀 깍지를 만들었다. 둥글게 손질된 손톱이 손등을 눌렀지만 전혀 아프지 않았다. 식은땀이 살짝 밴 손바닥은 촉촉하고 따뜻했다.
"이렇게 키스를 할 수도 있지."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흐려진 동공이 멀뚱하게 서로를 보다가 천천히 거리를 좁혔다. 입술을 맞대기 직전 살짝 감기는 눈을 야마토는 좋아했다. 차가운 안경테가 눈썹뼈에 부딪혔을 테지만 가쿠는 얼굴을 떼지 않았다. 오히려 각도를 바꿔가며 더욱 깊숙히 다가왔다.
서로의 타액으로 반짝거리는 입술을 핥고 떨어지자마자 아하핫, 두사람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이번에야말로 침묵이 어색하지 않았다. 상기된 뺨과 떨리는 속눈썹이 보일 정도로 얼굴이 가까웠다. 코앞에서 뜨거운 한숨이 얽혔다. 야마토는 안경을 벗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왜 안경을 벗는 거지? 아직 덜 마셨잖아."
음, 역시, 조금 더 마셔두는게 좋으려나. 야마토는 테이블 귀퉁이에 아슬아슬하게 올려져있는 맥주캔을 들어 찰랑거리는 정도를 가늠하고 고개를 뒤로 젖히며 바닥에 남은 마지막 한 방울까지 긁어서 마셨다. 냉장실에는 아직도 맥주캔이 많이 남아있을 테지만 부엌까지 갈 여력은 없다. 아마 오늘 밤에는 계속 없을 것이다. 빈 캔을 바닥에 굴리며 야마토는 알콜냄새가 섞인 날숨을 한숨처럼 내뱉었다.
"그야 지금부터는, 안경이 방해되는 일을 할거니까⋯?"
하얗고 단정한 얼굴이 술기운이 아닌 다른 것으로 달아오르는 것이 안경 없는 눈으로도 잘 보였다. 가쿠가 다급한 손으로 어깨를 밀치자 못 이기겠다는 듯 소파에 털썩 누워버렸다. 이 뒤로는 눈을 감아도 알 수 있어서 야먀토는 즐겁게 웃었다. 짧은 밤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