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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여행

랜걸

"총각 파티?!"
"어."
"너랑 나랑?!"
"어."
"왜?"
"왜냐니. 당연하잖아."

야마토는 살짝 뚱한 표정을 하고선 딸기가 과일이냐는 듯한 질문을 받은 것처럼 구는 가쿠에게 어느 지점부터 짚어야 할지 막막했다. 라이벌이자 동료 아이돌 그룹의 리더가 언제부터 누구랑 연애를 해왔길래 결혼한다고 하고, 결혼 전에 총각 파티를 하러 간다고 하며, 그걸 왜 본인과 가는 것이 당연한지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그, 왜? 너 결혼해?"
"…."

총각 파티니까 결혼이 분명히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갑자기 이 녀석의 동료들이나 류노스케에게 에로에로비스트 이미지 메이킹을 한 야오토메 파파가 어쩌다 흘린 말 때문에 가쿠가 어떠한 오해를 한 것이 아닐까 싶어 물었다. 제발 그쪽이어라. 그냥 장난이어라.

"…비밀이야."

야마토는 그 대답을 듣고 골이 뎅- 하고 울리는 기분이 들었다. 대체 뭘 비밀로 하려고 했을까. 아니, 언제까지 비밀로 하려고 했을까? 애초에 총각 파티는 결혼에 필수 불가결인 요소가 아니지만 결혼은 총각 파티에 필수 불가결인 요소인데 가쿠는 도대체 어느 부분을 비밀로 유지할 수 있을거라 생각한 걸까? 총각 파티를? 아니 그렇다기엔 얘가 먼저 나에게 말을 꺼냈잖아? 그럼, 결혼을? 총각 파티를 가자 해놓고?

같은 질문이 물고 물어 제자리를 빙빙 돌았다. 결국 본인에게 물어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총각 파티를 가자고 해놓고 결혼을 비밀로 하려고 했다고?"
"이 녀석, 내가 바보인 줄 알아? 결혼은 너한텐 비밀이 아니지! 비밀 결혼이라고 비밀 결혼!"

야마토는 아- 하고 얼빠진 대답을 했다. 순간 자기가 가쿠를 너무 바보 취급한 것이 미안하면서도 동시에 마음 안쪽이 서늘하게 식는 경험에 그에게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렇구나. 나는 네 비밀 결혼 안에 들어가는 사람이구나. 발밑에 뚜렷하게 그어진 선에 마음이 시리다. 너무 시려서... 야마토는 눈앞에 자신이 알고 있는 수많은 망한 사랑 뮤직비디오가 지나가며 수백 개의 선율들 가운데에 자신이 선 것을 발견했다. 아아…! 서글픈 청춘이여…!

하지만 야마토는 내색하지 않았다. 어른이니까. 그의 아주 가까운 지인이 되었으니, 마음의 빗장 단단히 걸어 잠그고 열쇠를 저 깊은 설산의 갈라진 계곡에 던져 세상에서 가장 처량한 표정을 속으로 삼키리라. 그러다 지나가는 스노우보더가 왜 그렇게 서 있느냐 물어볼 것이고 야마토는 그럴 때면-

'아아, 마음을 잃은 자는 웃어야지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라고, 대답하며 얼어붙은 눈물을 닦아 내리라 다짐했다. 조금 전에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던 선율 하나가 원래 있던 선율을 찍어 누르고 인트로를 재생하기 시작했다. 아아…! 이 가사의 시작이 마치 자신의 처지와 비슷해 지금 당장 자기 자신을 껴안고 싶은 기분이 드는 야마토는-

"못 가냐?"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도 제 눈치를 살피는 듯한 표정을 짓는 가쿠에게 감히 못 간다고 말하지 못했다. 죽어도 못했다! 저 자식은 자기 얼굴을 정말 잘 써먹는다. 잘 써먹는데 그게 능동적으로 잘 써먹는 게 아니고 질질 흘리듯 잘 써먹었다. 뻔한데 의도하지 않은 수작에 다 걸려 넘어가는 사람이 니카이도 야마토였다.

"아냐. 가자. 네가 가자는데 시간 내서라도 가야지."

야마토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자신의 목소리에 비운이 절절 흘러넘치는 게 가히 신인 연기상을 받을 정도로 절절함이 과하지 않았나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관없다. 가쿠는 결혼할 것이고 야마토는 가쿠의 베스트맨이 될 것이다. 사회를 봐야 하나? 결혼식 구석에서 눈물이나 닦을까?

"좋아!"
"근데 너 나한테 다다음주 일정 비우라 하지 않았어? 그거 때문에 내가 보름 동안 개고생했는데 설마 총각 파티 때문이었어?"
"원래는 널 공항에 데려갈 때까지 비밀로 하려 했는데 준비하다 보니 그건 어렵겠더라고."
"에? 공항?!"
"총각 파티할 거면 제대로 즐겨야 하지 않겠어?"
"어, 어이. 너, 너… 그냥 말 안 하면 안 돼? 총각 파티도 그냥 그만두자. 결혼도 안 하면 안 돼?!"
"라스베가스로 가자고!"

얼결에 결혼하지 말라는 본심이 나와버렸지만, 말이 겹쳐서 그런지 가쿠는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초롱초롱한 두 눈을 빛내며 라스베가스에 갈 생각이 충만한 가쿠의 얼굴을 보자 또 하나의 영상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깊은 밤, 조명이 꺼지지 않는 라스베가스. 유명한 웰컴 표지판을 등지고 서로 어깨동무하고 셀카를 찍는다. 오픈카를 운전하며 밤거리 분수 쇼를 돌아도 끝나지 않는 빛의 향연. 교통이 통제되고 어디서 데려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코끼리 행진이 몰려와 흥겨운 램프의 요정이 춤추는 노래와 함께 들썩거리며 퍼레이드 행렬이 가쿠와 자신의 목에 화려하고 기다란 파티 목걸이를 씌워준다. 그때쯤이면 둘 다 푸짐하게 취해 앞뒤 분간을 못 하겠지.

그렇게 가쿠가 파티장에 간다고 하면…. 그냥 혼자 숙소로 돌아가서 속절 없이 흐르려 하는 눈물이나 참아야 하지 않을까? 아아…! 세 번째로 흘러나올 참극의 노래가 방금 정해졌다. 후렴구의 가사가 아주 인상적인 곡이지. 잠깐만. 가쿠를 홀로 파티에 보내면 분명 누구에게 호구 뜯겨 그의 모든 여행경비가 거덜 날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니 라스베가스는 카지노의 도시잖아. 미국의 카지노는 뭐가 다를까? 잭팟 한 번 정도 땡겨보면 기분 참 좋겠지? 아아, 정장 입고 블랙잭 판의 칩을 쓸어모으는 가쿠도 정말 멋있을 것이다.

"별로야? 딴 데로 갈까?"
"아니."

'올인-' 이라고 나지막하게 말하는 가쿠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꼭 봐야겠다. 세상엔 카지노가 참 많지만 갈 것이라면 그에게 걸맞게 세계 최고의 카지노의 도시에 가서 그것을 봐야겠다. 너는 나의 오랜 짝사랑의 종지부를 이렇게 화려한 도시에서 찍게 배려해 주는구나. 가쿠의 배려에 고마워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저울질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머릿속에 흐르는 네 번째 곡이 제법 희망차니 고마워하는 것이 어울릴 것 같았다.

"꼭 가야겠어."

야마토는 내심 비장하게 말을 꺼냈다. 무언가를 결심한 아이돌 그룹의 리더의 육중한 마음가짐으로.

"가서 죽여주는 총각 파티를 즐기고 오자고!"
"오오!"

야마토는 가쿠와 결의를 다지면서도 몰랐다. 혼자 눈물 한 방울 찔끔 흘리고 끝낼 줄 알았던 여행이 탈수 상태가 될 정도로 울며불며 끝날 줄은. 하지만 자신의 미래를 알지 못하는 야마토는 그저 어떤 옷을 챙겨 가야 하나 하는 생각뿐이었다.





- Day 1 -

가쿠와 야마토는 각자 미국 로케 촬영을 다녀온 적이 있어 미국 자체는 처음이 아니었지만, 관광으로는 처음이었다. 길고 긴 비행시간을 끝내고 입국심사 줄을 서는 가쿠는 도저히 12시간의 장시간 비행을 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아서 재수 없었다. 분명 목에는 목베개를 두르고, 실내임에도 선그라스를 끼고 부스스한 머리를 손으로 대충 턴 것 같은데 얼굴에서 광이 났다. 재수 없을 정도로.

가쿠는 저에게 심사를 먼저 받을 거냐고 물었지만, 살짝 귀찮아서 거절했다. 오케이하고 먼저 심사를 받으러 들어간 가쿠와 심사관의 대화가 조금씩 들렸다.

"라스베가스에 얼마나 계십니까?"
"오, 어, 음… 5일 동안 있을 예정입니다."
"네바다주 말고 다른 곳을 방문할 예정입니까?"
"아니오. 온리 라스베거스!"
"하하, 미국에 방문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아, 파티요."
"…무슨 파티를 가십니까?"

평범하게 대화하는 것 같았는데 가쿠를 심사하던 남자 심사관의 표정과 목소리가 바뀌었다. 대놓고는 아니지만 말을 쉬는 타이밍이나 음색의 변화를 들었을 때 충분히 눈치챌 수 있었다. 심사관 앞에 서 있는 저 허여멀건한 멀대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저 바보! 어느 입국 심사관이 자국에 파티하러 왔다는 남자를 두 팔 벌리며 웰컴! 하겠냐고!

"총각 파티!"
"네?"

심사관이 못 알아들었다. 단순히 못 알아들어서 그런 거겠지만 눈썹을 치켜올려 이마가 주름진 모습이 제법 사나웠다. 야마토는 몸에 한기가 도는 것을 느껴졌다. 이대로 연행되면 어떡하지? 감히 그 잘생긴 얼굴로 자국의 여성들을 홀리러 왔냐며 한 소리 하면 어떡하지? 아니 사실 연행 되어도 가쿠는 죄가 없으니까 무사히 풀려나야 하는 게 원칙인데 가쿠 성격상 고분고분하게 굴지 않다가 미국 경찰의 심기를 건드려 일이 커지면 어쩌지?! 총각 파티는? 결혼은? 트리거는?! 아이돌리쉬세븐은?!

"힘!" (Him!)

그 짧은 사이에 맴버들과 스태프, 사장님 모두가 간장에 밥 비벼 먹는 삶을 상상한 야마토는 의지가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검지로 저에게 삿대질하는 가쿠를 보며 뭔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미!" (Me!)

저를 가리켰던 손가락은 이번엔 가쿠의 가슴 중앙을 콕 찔렀다. 야마토는 가쿠가 하려는 말이 무엇이 되었든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으면 했다. 기내용 캐리어를 내팽개치고 뛰다가 벗겨질 슬리퍼를 무시하고 나가면 사방에 있는 모든 경찰들이 야마토를 저지하러 올 것이다. 끌려가고, 연행되고, 가쿠도 동승객이라 조사를 받겠지. 아아, 간장밥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하지만 희망은 있다. 가쿠가 이상한 소리를 할 것이란 건 사실 감일 뿐이었으니까.

"버진!" (Virgin!)

누가 동정이란 단어를 저렇게 희망차고 결의에 차게 말하냐.

"노모어!" (No more!)

야마토는 안경 밑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미간의 콧대를 꾹꾹 잡았다. 가끔 아네사기가 가쿠에게 하는 잔소리에 이런저런 생각만 했던 것 같은데 왜 그렇게 잔소리가 많을 수밖에 없는지 십분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심사관이 폭소한다. 입국심사장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쪽을 쳐다본다. 아. 누군가가 분명히 알아봤을 텐데. 제발 가쿠가 한 말을 아무도 못 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가쿠나 야마토나 각자의 휴가를 써서 해외로 나간다고만 말했지 그것이 동반이고 총각 파티인 것은 아무도 몰랐다. 그러니 아네사기에게 래빗챗을 보내도 괜찮…지 않겠지.

가쿠의 몫까지 쪽팔림을 감당하고 있는 야마토는 가쿠가 입국 도장이 찍힌 여권을 돌려받으며 심사장을 나서는 걸 지켜봤다. 자신을 바라보며 엄지를 척! 하고 내미는 저 안기남 1위 야오토메 가쿠를 자신만 알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심사관에게 걸어갔다.

"총각 파티하러 오셨다고요?"
"하아아… 네…"

심사관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야마토를 바라봤다. 삼촌뻘 정도 되는 남성이 자신을 바라보며 좋을 땝니다~ 라고 말하는데 야마토는 어색한 웃음을 흘려보내며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의례적인 질문을 받고 야마토의 여권을 돌려주며 심사관은 쾌활한 얼굴로 말했다.

"웰컴 투 라스베가스. 좋은 시간 보내세요."
"아하하… 가, 감사합니다."

심사관도 야마토에게 엄지를 척! 하고 내밀었다. 뭐, 입국을 무사하게 심사해 주었으니, 그것에 대한 답례라고 생각하며 엄지를 마주 들며 야마토는 입국심사장을 빠져나왔다. 수하물 안내판 앞에 서서 손을 들고 저를 확인하는 가쿠가 보였다. 야마토는 여권으로 얼굴을 가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이 여행은… 초장부터 난관이 장난 아니었다.





- Day 2 -

"레이디스! 설마 벌써 지루한 거야?"

야마토는 맹세코 저 사람들 뒤에 나기가 있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저 남자들의 근육이 터질 것처럼 부풀어있고 복근이 꿀렁거리는 게 인간 같지 않지만, 나기가 한 번쯤 일탈한다고 해서 이상하진 않을 테니까. 우아한 근육질의 나기… 잠깐 괜히 이상한 상상을 하게 되잖아.

꺄아아악-!

야마토는 눈앞의 광경을 믿지 못했다. 이 회장에서 남자는 무대와 객석을 자유자재로 오가며 나기처럼 멘트를 던지는 근육질의 퍼포머들과 자신 그리고…

"저렇게 꽉 끼는 바지를 입고 어떻게 저렇게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거지?"

이 모든 걸 흥미롭다고 바라보는 가쿠뿐이었다.

"우리 여기에 왜 온 거냐."
"왜 그래. 재미없어?"
"저렇게 많은 여자들이 나기처럼 플러팅 하는 남자들에게 좋다며 꺅꺅거리는 게 흥미롭긴 한데-"
"무슨 소리야. 로쿠야랑 저 남자들은 달라도 한참 다르잖아."
"아니 그게 아니고, …아니다 됐다."

'싱겁긴' 하며 무대로 다시 고개를 돌린 가쿠의 뒤통수를 보고 있자니 기분이 정말 이상했다. 여긴 왜 왔을까? 쟤는 왜 여길 오고 싶어 했을까? 나는 누구인가? 따위의 질문이 머릿속에서 끊이지 않았다.

처음엔 그저 오페라석에서 뮤지컬을 보러 오는 건 줄 알았다. 극의 초장부터 근육질의 남자들이 등장하는 게 신기하다고 생각했는데 점점 안무가 외설적으로 변하더니…. 끈적한 춤을 단체로 추곤 갑자기 마이크를 집어 들어 회장의 관객들에게 목이 터져라 인사를 할 때부터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여기엔 뭐 하러 왔냐, 좀 더운 것 같지 않냐 같은 저질스러운 말을 하더니 남친들은 집에 잘 있냐고 하는 말에 깜짝 놀라 흠칫했다. 그랬더니 가쿠가

'오, 초장부터 되게 도발적인데?'

하는 것이었다.

야마토는 가쿠를 쳐다보며 상황 설명을 요구하는 묵언의 신호를 보냈으나 곧 새신랑이 될 저 정신 나간 놈은 무대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근육질의 퍼포머들은 무대에서 손을 뻗는 여자의 손을 잡아 올리며 스테이지 위로 초대하고 무대 한가운데 있는 의자에 앉혀서… 무언가를 했다. 야마토가 도저히 부끄러워서 제대로 볼 수 없어 정확히 뭘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야마토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개를 돌려 가쿠만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이런 공연은 전 세계에서 라스베가스가 최고이기도 하잖아. 게다가 여자들이 스트립쇼 하는 곳을 가는 건… 좀 그렇잖아."
"너 총각 파티가 뭔지는 알고는 있는 거지?"

'팟!'

지하 세계의 간부들이 사업장 확인하러 온 것처럼 구는 두 남자가 앉아 있는 오페라석에 갑작스럽게 스포트라이트가 비쳤다. 야마토는 평생 없던 순발력을 발휘해 몸을 숙였다. 가쿠는 멍하니 무대와 관중을 지켜보는 것 같아서 뒷덜미를 잡고 같이 끌어내렸다. 켁! 하고 가쿠가 콜록거렸지만, 얼굴을 가리는 게 제일 중요했다. 상황 파악을 채 하기도 전에 무대에서 진행자가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한 것 같다. 이제 어떡하지? 라고, 생각하는 찰나에 오페라석 출입문으로 누군가가 들어왔다.

"오! 나한테 동물을 고르라고 한 메일을 되게 늦게 봤는데 탈을 준비한- 으븝!"

야마토는 땡큐 라고 말하며 직원이 가져다준 탈 중에서 집히는 아무거나 가쿠의 머리통에 씌웠다. 그런데 그게 하필 닭머리 탈이었다. 얇은 고무에 색을 입힌… 은행 강도들이 쓸법한 그런 탈 말이다. 야마토는 손에 남은 탈을 보고 자기 머리에 썼다. 탈에 뚫린 두 눈구멍으로 가쿠의 닭 탈이 겨우 보였다.

"넌 토끼 탈이네? 난 뭐야?"
"…닭대가리."
"뭐?!"
"자, 이쪽으로 오시죠."
"자, 잠시만요! 잘 들어 야오토메. 우리는 가서 손짓발짓으로만 소통해야 해 알았지? 목구멍이 막혔다 생각하고 웃음소리도 내면 안 돼!"
"어, 어어? 그, 그래 알겠어."
"아네사기씨 한테 혼나는 거 무섭잖아 솔직히!"
"그, 그렇지! 그래, 맞아.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솔직히 가쿠가 정말로 정신머리가 있었으면 라스베가스에 와서 이런 공연에 오지도 않았겠지만 이미 온 이상 지금 당장의 정신머리를 챙겨줘야 했다. 우리에게 가면을 건네준 남자는 벽에 붙어있는 계단과 오페라석을 가로막고 있는 간이 문을 열었다. 벽을 쭈욱 따라 무대로 내려가는 계단을 따라 내려가는데 스포트라이트가 꾸준히 가쿠와 야마토를 계속 비춰주고 있었다.

무대에 다다르자, 안내원은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우리에게 무대 중앙 쪽으로 손짓했다. 계단 내려오는 내내 손을 흔들고 내려온 가쿠는 당당하게 진행자(라고 했지만, 근육질 퍼포머 중 한 명이었다.)에게 다가갔다.

"어서 오세요! 높은 곳에서 내려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와하하 하고 관객들이 웃는다. 이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가쿠였어도 자신들이 일본의 아이돌이라는 말은 안 했겠지. 라고, 생각하는 순간 가쿠가 닭 탈을 쓰고 묘하게 거만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뭐지? 컨셉 질인가? 지금 나 빼고 몰래카메라 같은 거 하는 건가?

"토끼 탈을 쓰신 형씨는 부끄러움이 많으시군요?"

야마토는 리바레와 예능 토크를 한다 생각하고 뒷목을 긁으며 부끄러워하려 했으나 닭 탈을 쓴 사나이가 냅다 어깨동무하는 바람에 휘청하고 넘어질 뻔했다. 가쿠가 어깨를 붙잡고 저를 흔드는데 벗어나고 싶어 몸부림치니 가쿠가 반대쪽 손으로 토끼 탈의 코를 톡톡 친다. 탈이 심하게 흔들리면서 시야 구멍이 흔들려 좀처럼 눈을 둘 곳이 없었다.

"아하하, 잘 알겠습니다. 라스베가스엔 처음 오셨나요?"

가쿠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긴 왜 오셨나요? 우린 보통 저희 말고 다른 남자들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거든요. 그런데 사연이 좀 있으신 것 같길래…."

닭 탈을 쓴 남자가 어깨동무를 풀었다. 말하려는 것처럼 흡 하고 숨을 쉬다가 야마토가 일러둔 말이 생각이 났는지 멈칫하고는 오른쪽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았다. 저 자식 도대체 뭘 하려고?!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가쿠가 왼손을 든다. 왼손의 손가락이 접히는 모양새가 영 심상치 않다고 생각되자 야마토는 손부터 뻗었다.

한 손은 가쿠의 어깨를 잡고 다른 한 손은 가쿠의 손목을 잡았다. 부르지도 못하고 몸으로 저지해야 하는 상황에 동작은 왜 이리 굼뜬지. 이미 오른손 동그라미 구멍으로 손가락이 들어갔기 때문에 늦었다 생각이 들었지만, 가쿠는 기꺼이 야마토가 당기는 대로 몸을 돌려주었다. 갑작스럽게 휙! 하고 몸이 틀어진 가쿠 때문에 진행자도 놀라며 야마토를 쳐다봤다.

가쿠의 오른손 동그라미는 왼손 약지에 끼워져있었다. 반지를 형상하듯이.

"와! 새신랑의 베스트맨 이 더하네! 지금 딴 거 생각해서 그런 거죠?"

관중이 우~ 하면서 놀리고 깔깔 웃는 소리가 섞여 든다. 야마토는 가쿠에게 어깨를 기댄 손을 그대로 둔 채로 고개를 푹 숙였다. 야마토는 보지 못했지만, 닭 탈이 양옆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야마토는 가쿠와 함께 변태로 낙인찍히는 것을 막기 위해 몸을 던졌지만, 순식간에 자신만 변태로 찍힌 것이 억울했다. 이곳에 저를 말도 안 하고 데려온 사람은 저 닭 탈을 쓴 사람인데.

"아무튼, 총각 파티를 하러 오셨다는 거죠?"

닭 탈은 또다시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곳엔 왜 오셨나요?"

그건 이쪽도 궁금한 처사였다. 얘는 왜… 여기 왔을까? 일탈도 안 하고 남의 데이트를 보러 온 것처럼 여자 관객들만 받는 이런 곳에… 대체 왜 왔을까? 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가쿠는 또 야마토에게 어깨동무했다. 그러곤 어깨동무하지 않은 손으로 하트 반쪽을 만드는 게 아닌가? 이 자식 왜 이러지? 나 몰래 술이라도 마셨나?

야마토가 가만히 쳐다만 보고 있자 기다리던 닭 탈이 고개를 살살 돌리며 토끼 탈을 바라봤다. 빨리 나머지 하트를 만들지 않고 뭐하냐는 듯 가만히 있는 토끼의 손을 쳐다봤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토끼 탈을 마주 봤다. 키득키득하고 웃는 관객들의 웃음소리를 듣고 난 후에도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니, 진행자가 가쿠 너머로 상체를 기울이며 빼꼼 쳐다봤다. 야마토는 한숨을 픽 쉬고 오른손을 엄지로 만들어 가쿠의 하트 손 옆에 두었다.

관객들과 진행자도 따라 웃었다. 한참 웃고 보니까 이상한 기분을 느낀 가쿠는 야마토의 엄지를 올린 손을 탁! 하고 쳤다. 야마토는 가쿠가 콩트를 짜기라도 한 듯, 하트 손을 만들어서 가쿠와 온전한 하트를 만들어냈다. 사람들이 휘파람을 휙휙 불며 손뼉을 쳤다. 왜? 얘랑 나랑 결혼 하는 것도 아닌데? 기분이 이상해져서 은근슬쩍 엄지로 또 바꾸니 가쿠가 바로 반응하며 손을 또 찰싹 치는 것이다. 아니 이 자식이 지금! 이라는 말이 턱밑까지 올라와 어깨동무를 풀며 바둥거리려니 가쿠가 재빠르게 목을 걸어서 토끼 탈의 목을 가두며 조여왔다.

"자자, 사랑싸움은 나중에 하시고 일단 들어가시죠. 라스베가스에서 즐거운 여행 되시길!"

실랑이하고 있자, 진행자가 갑자기 귀찮다는 듯한 시늉을 하며 축객령을 내렸다. 그 말을 듣자마자 닭 탈을 쓴 가쿠가 갑자기 몸을 숙이더니 그가 일어남과 동시에 야마토의 몸도 함께 쑤욱 하고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야마토는 비명을 집어삼키며 가쿠를 밀어냈다. 가쿠가 한쪽 팔로는 야마토의 어깨를 감싸고 다른 팔로는 무릎 안쪽을 감싸며 공주님 안기를 한 것이다. 밀어내면 진짜 떨어질 수 있었지만, 가쿠가 제법 단단하게 붙잡고 있어 그냥 안기기를 거부한 고양이… 아니, 토끼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계단을 올라가는 내내 사람들이 휘파람과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아니 진짜 왜?

"머리 조심하고."

닭탈의 남자는 둘이 원래 앉아 있던 오페라 석을 지나 출구로 향했다. 왜 더 안 보는지 궁금했으나 야마토는 더 이상 이 장소에 있고 싶지 않아 그냥 군말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렇게 두 남자는 서로의 탈을 벗을 생각도 않고 안고 안긴 채로 주차장까지 갔다가 근처를 돌고 있던 순찰차 눈에 띄어 곤혹을 치른 것은 덤이었다.






- Day 3 -

"이상한 짓거리 하지 마쇼."

머리를 감지도 못하고 씻지도 못하고 거지꼴이 된 일본 안기남 1위와 그의 베스트맨은 밤새도록 유치장 있다가 방금 풀려난 참이었다. 동물 탈을 쓰고 여성들만 받는 공연장의 주차장에 수상하게 배회하며 주차를 한 차를 찾던 두 사람은 정말 운이 나쁘게도 근처 순찰을 돌던 경찰관에게 제대로 찍혀버렸다. '그런 곳을 왜 남자 둘이서 갑니까?'라는 말에 '그러니까요!'라고 흥분하며 소리 지른 야마토 덕분에 둘의 변론은 공중 속에 분해되어 사라졌다.

속으로 '좆됐다' 라고 생각함과 동시에 가쿠와 야마토가 조사를 받던 경찰서에 갱들이 한 무더기 잡혀들어왔다. 중국계 마피아들이 마약 유통을 하다 덜미가 잡힌 것이다. 안 그래도 야마토와 가쿠의 횡설수설 하고 있던 터라 마피아들과 다 함께 유치장에 딸려 들어가 버렸다.

경찰들은 한동안 마피아 건에 집중하다가 숨 좀 돌릴 즈음에 확인차 공연장을 들렀고 그들이 그저 부끄럽고 손이 바빠 탈을 벗지 못한 관람객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경찰들은 둘을 풀어주었다.

"…벌써 기사가 난건 아니겠지?"
"내가 확인해 봤는데 아직 조용해."
"우리가 거지꼴이긴 해서 다들 못 알아볼 것 같긴 한데…"

가쿠와 야마토는 사실 본인들 포함 도합 열 명의 아이돌 인생을 끝낼 뻔했다. 아니 사실 아직 안심할 단계는 아니긴 했지만 일단 둘이 만 하루 동안 씻지 않아 꾀죄죄하므로 엔간한 팬들도 그들을 못 알아볼 상황이니 누군가에게 또 발각되기 전에 얼른 돌아가야 했다.

한 자릿수로 남은 핸드폰 배터리를 겨우 붙잡고 우버택시를 불러 공연장까지 차를 타고 가는 동안 가쿠와 야마토는 서로를 쳐다보지 않았다. 뒷자리의 각각 창문 밖을 바라보며 모르는 사이처럼 굴었다. 그 차 안에서 눈알을 가장 열심히 굴리며 둘의 눈치를 보는 사람은 택시 기사였다.

그렇게 공연장 주차장에서 장시간동안 방치당해 고온 건조기가 된 차를 타고 호텔로 돌아온 둘은 각자의 매니저에게 전화하고─같이 여행을 왔다는 것은 말하지 않았다─깨끗하게 씻고 유치장에서 잠들지 못한 피로를 풀며 하루 종일 밥도 안 먹고 잠만 잤다.







- Day 4 -

야마토는 새벽 네 시에 일어났다. 일어나니 가쿠가 창가에 앉아서 야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스름하게 동이 트는 밖을 보며 가쿠는 호텔 가운을 입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머리칼도 젖어있었다. 씻고 나오는 동안 단 한 번도 잠에서 깨지 않았다. 정말 간만에 하루를 푹 쉬었다.

"나 때문에 깼어?"
"아냐 그냥 눈이 떠졌어."

안 봐도 까치집이 되었을 것 같은 머리를 대충 탈탈 털고 안경을 쓰고 가쿠가 앉은 창문 맞은편에 앉았다. 가쿠는 크래커를 몇 개 올려둔 커피 컵 접시를 야마토 쪽으로 밀었다. 소금이 가볍게 쳐진 크래커를 집어 들고 입에 넣으니 어느새 가쿠가 우유 한 잔과 물 한 잔을 따라주었다. 우유를 집어서 마시니 가쿠가 피식 웃으며 물 따른 컵을 집어 마셨다. 웃긴 왜 웃어.

"넌 왜 깼는데?"
"아직 시차 적응 중인가 봐. 그런데 잠은 진짜 잘 잤어."
"시차 적응할 때쯤에 일본 돌아가겠네."

가쿠가 작게 키득거리며 물을 마시는 모습을 봤다. 그러다 불쑥 여태 계속 궁금했던 질문이 생각났다.

"너 라스베가스엔 왜 왔냐?"
"넌 그 질문 대체 언제 그만둘래?"
"아니 그렇잖아. 이제 곧 마누라 눈치 본다고 술 못 마시니까 이번 기회에 술독에 빠져야 할 텐데 운전한다고 맥주도 안 마시고. 캉캉 공연이라도 보러 갈 줄 알았는데 무슨 근육질 남자들이 드글드글 한 공연 보러 가고. 카지노 슬롯머신을 땡기지도 않잖아."
"캉캉이라니 너 할아버지냐?"
"아니 이 자식아, 말이 그렇다는 거잖아!"

와하하 하고 가쿠가 웃는다. 매번 가쿠가 찌르는 대로 터지는 본인의 모습이 참 형편없다고 생각할 법한데 결국엔 웃는 가쿠의 모습에 모든 기분이 풀리고 만다. 이제 이러는 것도 못 하겠지.

"글쎄. 너랑 단둘이 뜻깊고 흔하지 않은 여행을 하고 싶었어."

작게 움직이는 분수를 내려다보며 웃는 가쿠를 바라보니 속에서 여러 감정이 일었다. 가쿠가 의도한 여행을 본인이 불순한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미안했다. 아아, 슬픔에 잠기는 플레이리스트 중 여덟 번째 곡이 머릿속에서 재생되기 시작했다.

"관객들이 여자들만 있는 공연장에, 경찰서 유치장에, 세 번째 날은 잠으로 다 허비한 게 흔하진 않긴 하지."
"술독에 빠졌다면 어쨌든 하루는 쉴 예정이었어!"

이번엔 야마토가 파핫 하고 웃었다. 잔 속에 든 액체가 물과 우유일 뿐이지 둘은 제법 생기 있는 새벽을 보내고 있었다.

"고마워 니카이도."

야마토는 그 말을 듣자마자 마음이 쿵 하고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저 고맙다는 말이 마지막을 고하는 말 같아서. 오랜 짝사랑의 종지부를 찍는 말 같아서 마음 한켠이 연달아 찌르르해진다.

"…고마우면 한턱쏘던가."
"좋아! 내가 한턱쏜다!"
"뭐?! 뭘? 아냐 미안해. 방금 말 취소한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마."
"하하, 빼지 말고. 카지노는 즐겨야 하지 않겠어?"

그래. 가쿠는 정말로 카지노에서 멋지게 한탕 즐기려고 턱시도를 한 벌 맞췄고 그는 야마토에게도 한 벌 맞추라고 졸랐다. 분명 이 턱시도를 결혼 때도 입을 텐데 왜 같이 같은 곳에서 맞추자고 했을까. 어차피 비밀결혼하면서 하객 초대도 거의 안 할 텐데 왜 야마토와 결혼하듯 턱시도를 맞추자고 한 걸까?

가쿠는 자신이 우겨서 한 일이니, 자신이 턱시도값을 내겠다고 했다. 어련히 괜찮은 대여점을 알아봤겠거니 했는데 셔츠, 나비넥타이, 바지, 구두까지 전부 하얀색인 것을 알았을 때 이것이 맞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가쿠의 것은 딱 반대로 셔츠까지 죄다 까만색이었다.

“역시 잘 어울릴 줄 알았어.”

너는 이런 계열의 하얀색이 잘 받는다면서 어디선가 금테 안경과 안경 줄을 주섬주섬 꺼내 씌워주었다. 씌우기 전에 안경닦이에 렌즈 코팅이 벗겨질 만큼 벅벅 닦아서 씌워주는 건 덤이었다.

“엘리베이터 버튼만 눌러도 더러워질 것 같아.”
“괜찮아. 이거 원단이 진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좋은 거라서 잘 안 묻고 묻어도 정말 잘 씻기더라.”

야마토는 사실 가쿠가 뭐라고 하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가끔 트리거와 활동 시즌이 겹치고 묘하게 가쿠와 착장이 비슷한 구석이 있으면 혼자서 기분 좋은 티를 감추느라 힘들었는데 이건 그냥 대놓고 맞춘 것이어서 이성을 제대로 붙잡고 있기 힘들었다.

야마토는 이상하게 눈물이 핑하고 돌았다. 야마토가 쓰고 있던 안경을 멋대로 벗기고 자신이 준비한 안경을 씌워주며 환하게 웃는 가쿠의 모습을 보며 이것은 마치 야마토에게 면사포를 씌우고 벗기는 일련의 과정 같았기 때문이다.

"뭐냐 왜 우냐."
"…이러니까 새삼 갑자기 네가 결혼하는 게 실감 나서."
"웃기네. 누가 들으면 네가 나 장가보내는 줄 알겠다?"

가끔 이럴 때 가쿠의 무신경함이 다행이라고 생각될 때가 있었다. 앞뒤 상황 따지면 이상한 행동과 발언뿐인데 가쿠는 그렇구나 하고 있는 그대로의 것을 받아들여 준다. 그럴 때마다 야마토는 가쿠에 거짓말하는 것 같아 심장이 조여왔다.

턱시도를 준비하자고 할 때 그만두자 할 걸. 그제 공연장에서 냅다 공주님 안기 하는 가쿠를 때려서라도 그만두라고 할 걸. 나란히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단둘이 처음으로 여행하는 기분을 만끽하지 말걸. 여행을 가지 않는다고 할 걸. 이제는 정말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할 때 그만 좋아할걸. 처음부터 그냥 좋아하지 말걸. 이게 좋아하는 감정이 아니라 우정이라고 계속 착각할걸.

눈물을 흘리는 만큼 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이 모든 후회가 구질구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괜히 쿨하게 굴겠다고, 언젠간 가라앉을 마음이라고 생각하며 몰래 바라본 것이 자꾸자꾸 커져 감당할 수 없어 울고 있는 본인의 모습이 초라하기 짝이 없다. 우는 야마토를 보고 놀란 가쿠를 진정시킨다고 나온 목소리에 울음이 가득 차 더욱 비참했다.

"이, 이상하네. 내가… 이러려던 게 아닌데, 그, 어, 그래, 개인적으로 일이 있어서… 있지 그게 뭐냐면-"
"말하기 힘들면 말 안 해도 돼 니카이도. 괜찮아."

그러곤 자기 어깨를 내어주며 천천히 안는 가쿠의 손길에 터지려는 눈물을 참는다고 입술 안쪽을 세게 물었다. 흐느끼는 모습이 꼴사나울까? 하는 생각이 잠깐 스쳤다.

"안 되겠다. 원래 없던 계획을 내일 실행해야겠어. 우리 원래 내일 오후 비행기라 체크아웃 시간 다 쓰고 공항 가려고 했는데, 조금 더 일찍 나와서 어디 들렀다 가자. 괜찮지?"

야마토는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뭘 한다는 건지 나중에 물어보기로 한 야마토는 천천히 정신을 차렸다. 아무리 마음이 있다 해도 가쿠에게 안겨서 훌쩍인 것이 급속도로 쪽팔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가쿠를 밀어내니 그가 순순히 품을 풀어주었다.

"꼭두새벽부터 정장을 열심히 차려입었으니 얼른 내려가서 슬롯머신이라도 땡기자고. 뭐 하는 거야 이게 꼴사납게…"
"파핫! 그래. 눈도 별로 안 부었으니까 얼른 내려가자. 나 사실 이게 두 번째로 기대됐어."

야마토는 첫 번째로 기대한 건 어땠냐고 나중에 물어보기로 하고 서둘러 고개를 돌려 카지노로 내려갈 준비를 했다. 무엇보다, '올인' 하고 칩을 전부 밀어 배팅하는 가쿠를 얼른 보고 싶었다. 턱시도를 입은 그를 한번 봤으니 그 장면은 더 상상이 잘 됐다. 머릿속에 그리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전율이 이는 모습을 두 눈으로 꼭 담아야겠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제법 잘 들어갔다.

그렇게 일생일대의 초간지 가쿠를 볼 생각에 가슴이 뛰었지만, 카지노엔 가쿠와 야마토처럼 차려입은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다들 편한 복장을 입고있었고 누군가는 쫄이를 신고 포커 테이블에서 칩 더미를 쌓고 있었다. 덕분에 둘은 카지노 직원에게 예식장을 잘못 찾아온 것이냐는 소리를 여덟 번 들었고, 딜러에게 결혼이 파토나서 온 것이냐는 소리를 두 번이나 들어야 했다.

게다가 가쿠는 카지노에서 칩을 그냥 말아먹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가쿠는 딜러에게 정말 너무너무 좋은 먹잇감이었다. 야마토는 그래도 소소하게 벌었지만, 가쿠는 가지고 있는 칩을 거의 다 소진했다. 오히려 야마토 자신이 블랙잭을 하다가 올인을 불러 옆에서 가쿠가 더 호들갑을 떤다면 떨었지.

그렇게 엉망진창으로 새벽 카지노를 끝내고 다시 낮잠을 자고, 저녁을 먹고 분수 쇼를 즐긴 뒤 라스베가스의 밤거리를 드라이빙하며 나름 알찬 하루를 마무리하게 됐다.






- Last Day -

아침부터 가쿠는 전화하느라 바빴다. 어딘지는 몰라도 예약해 둔 곳에 이름을 아주 정확하게 전달해야 하는 것 같았다. 가쿠가 둘의 이름의 영문 스펠링을 또박또박 정확하게 불러주고, 어느 이름이 성인지 이름인지 말한다고 부산을 떨었다. 그렇게 호텔에서 체크아웃하고, 여태 먹었던 음식 중에서 가장 맛있었다는 핫도그를 먹고, 가쿠가 갑작스럽게 준비한 일정이 기다리는 곳으로 갔다.

그곳은 좀… 분위기가 이상했다. 간판은 'Eternal First Love' 영원한 첫사랑이라는… 누군가가 중학생 때 작가에 도전해 보겠다며 쓴 인터넷 소설의 제목 같은 것이 간판으로 달려있었다. 가쿠는 핫도그 가게에서 출발했을 때부터 굉장히 기분이 좋아 보였는데 '영원한 첫사랑'이라는 곳에 가는 것이 그의 인생에 일어난 일 중에서 가장 행복한 일이라는 것처럼 굴었다.

"…여기가 뭐 하는 곳인데?"
"곧 알게 될 거야."

뭔가 좀 무서워지는 말이었다. 6성급 호텔, 어마어마하게 좋은 원단으로 맞춘 턱시도를 입고 간 카지노, 3성 미슐랭 식당. 여태 누비고 다녔던 주요 장소들은 하나같이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좋은 곳들뿐이었는데 이곳은 그런 곳과는 거리가 멀었다.

작은 사무소와 주차장 없이 운전만으로 사무소 주위를 한 바퀴 도는 길이 나 있는 이곳은 딱히 내려서 건물로 들어가는 사람도 없고 주차된 차량도 없었다. 가쿠 말에 따르면 자기들이 첫 예약자라서 없단다.

가쿠가 핸들을 천천히 돌리며 오래된 빗자국이 기둥을 수놓은 콘크리트 차양 밑에 차를 세웠다. 건물을 빙 둘러싼 차도의 중간에 있는 곳이었고 가쿠가 차를 세우자 몇분 사이 차 몇 대가 뒤로 따라 들어와 가만히 정차했다. 그러나 아무 이유 없이 차를 멈춘 가쿠에게 누구도 크락션을 울리지 않았다.

"정확히 2분 남았어."
"…그 있지, 네가 하도 좋아하니까 내가 계속 추궁하는 것 같아서 말 안 했는데 대체 뭐가 2분 남은 거고 우린 여기 왜 온 거야?"
"음…."

갑자기 가쿠가 답지 않게 엄청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는 위를 올려다보며 야마토의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정말로 생각이란 걸 하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니 야마토는 오히려 더 불안해졌다.

"1분쯤 남은 시점에서 할 말은 아니긴 한데.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을 하는 거니까. 내 다짐을 얘기해줄게."

그래서 대체 뭘 하길래 네가 다짐씩이나 하냐고. 라는 생각을 하는 동안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사무소 문이 벌컥 열리더니 술배가 가득한 대머리 아저씨가 다림질이 하나도 안 되어있는 셔츠와 까만 바지 그리고 주름이 가득 잡힌 검정 구두를 신으며 메뉴판 같은 걸 들고 끝내주는 하품과 함께 저벅저벅 걸어 나왔다.

"네가 아이돌리쉬세븐이나 트리거를 걱정하는 건 알겠어. 하지만 네가 걱정하는 일들 없게 할게. 절대 후회할 일 없게 할게."
"…엥?"
"자, 시작하겠습니다. 가쿠 야…오토…메는 얌…마토 니카…이…도를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될 때까지 사랑할 것을 맹세-"
"맹세합니다."
"얌마…토 니카이도는 가쿠 야오토메를 죽을 때까지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까?"
"뭐라고요?!"
"하암, 두 분은 이제 부부가 되셨습니다, 이제 신랑은 신랑에게 뽀뽀하세요. 증서 쓰고 있겠습니다."
"잠깐!!!"

야마토는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드라이브스루에서 커피나 음식을 픽업해 가듯, 차를 타고 앉은 자리에서 결혼을 시키고 결혼증명서를 주는 간이 식장이 라스베가스에 많다고. 결혼식을 올릴 여유가 없는 젊은 부부들이나 라스베가스에 놀러 와 술을 진탕 마시고 홧김에 결혼을 질러버리는 생각 머리 없는 사람들이 이용한다고 했다.

"결혼하는 게 너랑 나였어?"
"어."
"왜?!"
"왜냐니! 너한테 고백받은 이후로 네가 신경 쓰여 미치겠어서 사귀자고 했더니 네가 결혼 같은 영원한 게 아니면 소용없다며!"

이게 무슨 소리일까. 가쿠가 지금 뱉은 말 중에서 이해되는 것이 하나도 없는 야마토였다. 분명 비슷한 얘기는 했는데 이런 식은 아니었다. 아니 그리고 얜 왜 내가 지한테 고백했다고 착각하고 있지? 연애의 불확실성에 관해 얘기한 적이 있긴 했는데 그 얘기 하기 전에 나한테 사귀자고 했었다고?! 이게 무슨 소리야!

"아, 몰래카메라인가?"
"뭐?! 내 진심을 뭐라고 생각하는거야!"
"여기 증서입니다."

아까부터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남의 대답과 반응엔 관심 주지 않는 주례사 같은 사람이 가쿠를 향해 메뉴판 같은 것을 내밀었다. 메뉴판 같았던 것은 예비 결혼증명서 포맷이었고 가쿠는 증서에 싸인을 하고 주례사에게 넘겼다. 주례사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증서를 받아 들고 다시 뭘 쓰기 시작했다.

"이게 몰래카메라가 아니면 뭔데!"
"내가 아이돌리쉬세븐이나 트리거를 걸고 이상한 소릴 할 것 같냐!"

그것도 맞는 소리였다. 야오토메 가쿠는 트리거를 걸고 허무맹랑한 소리를 할 바보는 되지 못했다. 그렇다면 진짜란 소리야? 내가 무슨 소릴 했는진 몰라도 그 말에 신경이 쓰이고, 사귀자고 하고, 총각 파티를 같이 오자고 하고… 아니 잠깐 결혼할 두 남자가 같이 총각 파티를 해외로 가는 게 말이 되나? 아무튼 그러고 지금 결혼까지 하는 게…정말이라고? 진심이라고?

야마토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생각을 멈추지 못했다. 아니라고 이성적으로 생각을 하려고 해도 감정적인 생각이 물꼬를 트면서 폭주하기 시작했다. 「힘!미!버진!노모어!」부터 시작해서 오른손으로 반지를 만들어 그것을 왼손 약지에 끼우고, 공주님 안기를 하고 무대를 퇴장했던 일이나, 웨딩드레스같이 순백색으로 맞춘 턱시도, 카지노가 두 번째로 기대되는 것이라고 했던 점과, 오늘 아침부터 즐거워서 정신을 못 차리던 모습까지. 야마토는 가쿠를 너무나도 잘 알았기에 그 모든 모습이 모두 꾸밈없는 진심이라는 것을 알았다. 동시에 그 모든 것들이 한 가지의 가정─정말로 가쿠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상정한다면 모든 의문이 풀린다는 점까지 완벽했다.

무언가를 깨달은 야마토는 갑작스럽게 조수석 차 문을 열고 내렸다.

가쿠는 좌절 어린 눈빛으로 야마토를 지켜봤다. 야마토는 두 눈에 눈물을 가득 맺은 채로 성큼성큼 차 앞을 돌며 가쿠가 앉아 있는 운전석 옆에 서 있는 주례사에게 다가갔다. 뭘 하려는 걸까 싶었는데 주례사가 떨떠름한 얼굴로 가쿠가 싸인한 증거를 건네줬다. 줄지은 차에 탄 사람들이 모두 맨 앞차의 사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행이게도 가쿠와 야마토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야마토는 증서를 찬찬히 살펴보더니 그 자리에서 북북 찢어서 공중에 흩뿌렸다. 가쿠가 차에서 내리려고 손잡이에 손을 올린 순간 야마토가 버럭 소리를 지른다.

"이건 무효야! 너랑 하는 결혼을 이런 곳에서 하라고?"
"…아?"

주례사는 이런 식의 커플을 많이 봤다는 듯이 하품하고 뒤편에 있는 차에 다가갔다. 다음 커플을 결혼시키려는 것 같았다.

"애초에 결혼이고 뭐고 난 좋아하는 거 숨기기에 바빴다고!"
"…티 엄청나던데?"
"조용히 해!"

가쿠는 양손으로 입을 합! 소리 내며 가렸다. 야마토는 씩씩거리며 말을 마저 이었다.

"나는 너랑 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이런 곳에서 덥석 결혼하라고 하면 할 것 같아? 다시 해! 고백하는 것부터 다시 하라고!"

가쿠가 입을 가리고 있던 손을 살짝 내렸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놀란 나머지 더 이상 입을 가릴 수 없게 된 것에 가까웠다. 가쿠는 펑펑 울기 시작한 야마토의 눈치를 살살 살피며 차에서 내렸다. 눈물이 하염없이 떨어지고있어도 안경을 벗어 닦을 생각조차 안 하는 야마토의 눈물을 한차례 닦아주었다.

"나쁜 자식. 나쁜 놈. 어떻게 이런 곳에서 은근슬쩍… 그리고 우리 애들이랑 트리거 걱정을 어떻게 안 해! 아예 그냥 아네사기씨에게 주례를 서달라 하지 왜!"

가쿠는 '네가 원하면 지금 당장 아네사기에게 전화할게' 따위의 말이 턱밑까지 올라오는 걸 꾹꾹 눌러 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상식을 초월하는 단단한 오해가 있었던 것 같은데 천만다행이게도 야마토가 거부하지 않은 것이다. 가쿠는 자신이 야마토의 상황에 놓여있다고 상상해 보았다. 야마토가 결혼한다며 같이 총각 파티에 가자고 하면 야마토와 얼굴 모를 여자가 팔짱을 끼고 웨딩마치를 걸어가는 것을 떠올림과 동시에 거절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영원히 야마토와 이전과 같은 관계로 돌아가지 못하고 어색하게 사이가 끝났겠지.

가쿠는 깨달았다. 아, 나 정말 오랫동안 엄청나게 사랑받아 왔구나. 이벤트성에 가까웠던 둘만의 첫 여행인 총각 파티는 엉망진창이 되었지만, 적어도 가쿠가 야마토에게 갚아야 할 마음의 크기가 확연히 다르다는 걸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야마토가 좋아지기 시작한 마음이 걷잡을 수 없어 표현할 길이 결혼식을 올리는 것 말고는 생각나는 게 없었는데, 야마토가 저에게 '네 사랑은 애송이의 사랑이야.'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는 경험을 했다.

'니카이도 야마토. 네 사랑의 크기를 압도해 주지!'

그렇게 아무도 시키지 않은 사랑의 경쟁에 불꽃이 붙었다.

가쿠는 야마토를 껴안았다. 야마토의 안경이 옷 위로 미끄러지며 슥 올라가고 처음 안경이 닿았던 자리가 천천히 축축해졌다. 둘의 포옹을 보던 차량 행렬의 사람들이 박수갈채와 휘파람을 불어주기 시작했다. 결혼 서약서를 벅벅 찢은 커플의 대화를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어도 포옹으로 끝나는 것을 축하해주는 박수였다. 아니, 어떻게 보면 대사가 필요 없는 한 편의 짧은 드라마를 보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야마토는 속으로 저 사람들에게 관람료를 걷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곤 자신이 그런 덧없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에 웃음이 나왔다. 가쿠가 뭐가 웃기냐고 묻길래 주먹으로 가쿠의 옆구리를 퍽 쳤다. 엄살을 부리며 알았다고 미안하다면서 등을 토닥이는 가쿠의 손길이 덥지 않고 따뜻했다.

그렇게 둘은 원정 결혼을 할 뻔한 총각 파티 여행을 끝마쳤다. 어쩌다가 서로의 말과 행동을 오해하게 되었는지는 차차 알아갈 것이다. 앞으로의 오해 빈도도 줄이기 위해서 둘은 꽤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길이 결코 화가 나게 하거나 피하고 싶은 길은 아닐 것이다.

가장 중요한 건 둘의 마음을 확인한 것이니까 말이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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