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반지
하래
슬쩍 보이는 창 너머의 밖은 이미 해가 져 어둑어둑해졌다. 집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해가 중천이었는데, 눈 깜짝한 새에 해는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야마토가 시커먼 밤하늘을 흘겨보면서 내일의 일을 떠올렸다.
기억하는 게 맞는다면, 야마토에게 내일 일은 없었다. 올해 초부터 시작한 장기 드라마 촬영이 이제야 끝나 정말 오랜만에 얻는 휴일이었다. 그리고 옆에 시끄러운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는 TV를 집중해 보고 있는 애인도 오후 일정 말고는 아무 일정도 없었을 터였다. 이 집에 발을 들이기 전에 주고받았던 대화에서 중요한 정보만 콕 집어낸 야마토가 캔을 소파 앞 탁자로 탁 내려놨다. 결론이 났다.
오늘은 묵고 가는 게 확정이겠네. 이런 일이 한두 번 있던 게 아니라, 이젠 집주인에게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야마토가 새 맥주 캔에 손을 뻗었다. 냉장고에서 꺼내고 오랜 시간이 지난 캔은 차갑지 않았다. 그에 비해 방은 서늘했다. 시원한 맥주를 선호하는 야마토도, 오히려 지금은 이 온도가 딱 적당하단 생각이 들었다. 캔 표면에 맺힌 물방울을 무시하며 야마토가 캔을 제 쪽으로 끌어서 들었다.
한창 TV에서는 프로그램의 도입부에서 슬슬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자막으로 거대하게 ‘모두가 기대하는 특별 게스트는!?’라며, 다음 전개를 위한 몰입을 끌어냈다. 이미 이 프로그램의 도입부 절반은 흘려들어 버린 야마토가 흥미 없는 눈으로 진행을 지켜봤다. 보통 이런 경우는 꽤 유명한 연예인을 내세우려 할 텐데.
[특별 게스트는 아이돌리쉬 세븐의 여러분입니다!]
“니카이도잖아.”
“나잖아.”
TV에 나오고 있는 MC의 말이 끝나고, 안에서 아이돌리쉬 세븐이 등장했다. 그 안에는 당연하게도 야마토도 있었다. 모니터링도 아닌, 이렇게 TV에 나오는 자신을 보는 건 또 오랜만이었다.
가쿠가 TV 화면의 구석에 있는 프로그램 타이틀을 힐끔 엿봤다. 트리거는 나온 적 없는 프로그램이었다.
“너 이런 프로그램 나왔었어?”
“모르겠는데. 최근에 나온 게 워낙 많아야지.”
“배부른 소리군.”
코웃음을 흘린 가쿠 뒤로 야마토는 기억을 떠올려 나갔다. 그제야 흥미 없었던 프로그램의 타이틀이 눈에 들어왔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타이틀은 익숙한 디자인이었다.
야마토가 짧게 감탄했다. 그리고 인상을 구겼다. 기억났다.
[그래서, 어때? 아이돌리쉬 세븐의 모두는 연인과 뭘 하고 싶을까?]
능청맞게 웃은 MC와 함께, 방송 속 자신이 이어 말했던 대답까지도.
“하필이면 지금 방송하냐!”
“뭐 어때서 그래?”
그렇게 말하는 가쿠의 얼굴은 입꼬리가 쭉 올라가 있었다. 이 프로그램의 도입부를 놓치지 않고 전부 들은 가쿠는 흥미롭게 TV 안의 야마토를 바라봤다. 어떤 대답이 돌아올지 꽤 기대하는 눈치기도 했다. 하지만, 야마토는 저 프로그램을 촬영했을 때 자신이 했던 대답이 가쿠가 원하는 대답이 아닐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야마토가 딱딱하게 굳은 고개를 돌려 TV 속의 자신을 바라봤다. 제발, 운명처럼 광고라도 나와서 이 분위기를 바꿀 수 있으면 좋겠다!
물론 그 바람은 이루어질 리가 없었다.
[그렇네요…. 역시, 귀여운 커플링이라던가? 그런 건 확실하게 증거가 남아서 연결되는 느낌이 있죠.]
[니카이도 군은 그런 쪽이 취향인 거야?]
[좋아하는 사람 한정으로.]
TV 속의 야마토가 능글맞게 한쪽 눈을 찡그렸다. 카메라는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전부 잡아냈다.
[형아랑 맞추고 싶으면 언제든 연락 줘.]
야마토가 카메라에 잡히도록 왼손을 들어 보였다. 그러곤, 오른쪽 검지로 왼손 약지를 툭 건드렸다.
[이 손가락, 비워 둘게.]
[꺄아아아아~!]
[네, 멈춰 주세요. 그리고 잘라 주실 수 있나요? 이 장면, 분명 논란 생길 거예요.]
[하하하. 딱딱하네, 이치. 참고로 형아는 귀여운 아이가 좋은데.]
[듣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하하하하하~!]
….
“…니카이도. 나 귀여워?”
“이상한 소리 하지 마!!!”
팍! 야마토가 강압적으로 가쿠의 손에서 리모컨을 앗아갔다. “뭐야!” 띡, 가쿠의 외마디 비명은 무시한 채 채널을 돌려버렸다. 돌아간 채널은 왁자지껄했던 아이돌리쉬 세븐을 대신하듯 단조로운 목소리의 기상 뉴스가 흘러나왔다.
방금 걸로 지금껏 묵혔던 체력을 전부 써버린 건지 야마토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파들파들 떨리는 손으로 집었던 캔을 내려놨다. 입맛이 싹 사라졌다.
한시름 놓았다는 모습의 야마토였지만, 여전히 흥분은 가시지 않아 얼굴을 넘어 목까지 새빨갰다. 가쿠가 그 목뒤로 손을 쭉 뻗었다. 툭, 손가락 끝이 목에 닿았다.
“악, 차가워!!”
닿자마자 야마토가 평소에는 볼 수 없는 반응 속도로 비명을 질렀다. 가쿠가 일부러 손바닥으로 목을 감쌌다. 손가락 끝으로는 안 느껴지던 체온이 뜨겁게 다가왔다. “으아아….” 야마토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의 목이 한층 더 붉어졌다.
“니카이도가 너무 뜨거운 거잖아.”
“나는 정상 체온이거든!”
“이게 어딜 봐서?”
“아, 아무튼 그렇다고!”
벌레라도 쫓듯 가쿠의 팔을 팍팍 쳐낸 야마토가 제 목을 자신의 양손으로 폭 감쌌다. 자신보다 훨씬 차가웠던 온도를 지워내듯 마구 문지르기까지 했다. 평소에 술을 마시면 먼저 뜨거워지는 건 가쿠면서 왜 이런 때만 차가운 건지, 야마토가 괜히 가쿠를 노려봤다. 가쿠는 영문도 모른 채 눈만 깜빡였다. 그조차 화를 불러일으켰다.
이러다간 이 잘난 얼굴에 말려들 것 같아 야마토가 고개를 홱 돌렸다. 가쿠의 미간이 좁혀졌다.
“왜 째려보다 말고 고개를 돌리는데?”
“됐어. 어차피 섬세함 없는 야오토메 군이 내 심정 따위를 알 리가 없지.”
힘없는 소리를 뱉은 야마토가 몸을 둥글게 말았다. 바뀐 채널의 소리는 귀에 닿지도 않았다. 여전히 열은 내리지 않아 얼굴 부근이 뜨거웠다. 왜 하필 이 녀석이랑 있을 때…. 볼멘소리는 입안에서 데굴데굴 구를 뿐, 튀어 나가지 않았다.
둥글게 변한 야마토를 물끄러미 보던 가쿠는 이내 TV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내일 비가 온다는 예보를 하는 기상캐스터의 위로 아까 흘러나왔던 야마토의 모습이 겹쳤다.
돌이켜 보면, 야마토도 지금까지 많이 변했다. 가쿠는 처음 아이돌리쉬 세븐을 인식했던 그날을 기억했다.
그때의 아이돌리쉬 세븐은 그들끼리는 사이가 돈독했지만, 방송과는 사이가 좋지 못했다. 카메라를 의식해 발음을 꼬던 리쿠나, 오히려 너무 의식하지 않아 촬영 현장에 폐를 끼치던 타마키나. 다른 멤버들도 마찬가지로 지금보다 더 미성숙한 모습을 보였다. 그건 리더인 야마토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이들에 비하면 능숙한 모습이었지만, 그 또한 미숙한 점이 있었다. 그보다 더 일찍 데뷔한 가쿠는 그걸 알 수 있었다. 제대로 카메라를 향하지 않는 시선은 카메라를 거부하듯 보이기도 했고, 오기 전까지 무슨 일을 했는진 모르지만, 신경 쓰지 않는 건지 손은 꽤 터 보였다. 사소한 부분까지 의식하지 않은 모양새였는데도 이 자리에 서 있는 건 리더라는 직책 때문인 걸까. 그때의 TV 안의 야마토의 시선은 투명할 터인 안경 렌즈에 막힌 듯 보였다.
그러나 지금은 능글맞게 카메라를 응시해 웃기도 하고, 그때보다 훨씬 도드라진 손을 들어 약지를 가리키기도 했다. 렌즈 너머의 시선이 더 올곧게 자신에게 도달했다.
이렇게 되기까지 야마토는 수많은 노력을 했을 테다. 그리고 그 안에는 가쿠가 모르는 노력도 있을 게 분명했다. 가쿠는 새삼스럽게 그만큼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걸 떠올렸다. 둥글게 몸을 만 애인과 자신은,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더 오랜 시간을 알고 지냈다고.
둥근 등을 가쿠가 쓸어내렸다. 여전히 시선은 TV 안의 기상캐스터를 향하고 있었다. 가쿠의 눈엔 그 기상캐스터가 비치고 있지 않았지만.
“쓸지 마.”
“왜.”
“말해야 알아?”
“말하지 않으면 모르지.”
욱한 야마토가 가쿠를 올려다봤다. 가쿠는 어느새 야마토를 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 야마토가 한 아름 차 있었다. 아까 전부터 계속 그러했다. 야마토가 입을 달싹였다. 시선은 다시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든 야마토의 얼굴은 아까 전의 흔들림 따위 남아 있지 않았다.
가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 자식, 설마.
“야오토메, 설마 신경 쓰는 거야? 저런 건 방송용 멘트인 게 당연하잖아.”
“너 연기지.”
“왜.”
“아까까지 그렇게 당황했잖아.”
“그건 네가 이상한 소리를 해서고.”
“내가 뭘 말했는데?”
“나한테 귀엽냐고 물어봤지.”
“근데 그건 네가 먼저 그렇게 말해서….”
“그렇게 말한 적 없거든!”
확 욱한 감정이 솟구친 야마토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니카이도?” 이름을 부르는 가쿠의 얼굴엔 조금 당황한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야마토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제 됐어. 형아는 피곤하니까 자러 갈래!”
“난 자고 가라고 한마디도 안 했는데.”
“아? 그러려고 부른 거였잖아.”
“그건 맞지만.”
새삼스럽게도, 야마토는 이미 가쿠에게 많이 물들어 있었다. 전에 자고 가라고 권유했을 땐 두 번은 거절했으면서. 이제는 먼저 자고 간다고 할 정도니까. 그 사실을 또 실감하게 된 가쿠가 쿡쿡 웃었다.
야마토는 웃는 가쿠가 못마땅하여 노려보다가, 왜 웃고 있는지를 깨닫고는 고개를 홱 돌렸다. 고개를 돌린 그의 귓바퀴가 붉었다. 야마토가 부러 큰 발걸음으로 익숙해진 침실로 향했다.
“잘자, 니카이도.”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못 들은 척 야마토가 문고리를 잡았다. 문고리를 쭉 밀어 열어내고, 침구에 시선을 두고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잘자.” 짧게 한 마디 남기고는 침실 안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거실에 혼자 남게 된 가쿠는 오랜 시간 동안 침실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겨우 그가 한 말은 이거였다.
“정말 고양이 같은 녀석이라니까.”
흐리게 웃은 가쿠가 침실에서 고개를 돌려 TV를 다시 바라봤다. 일기 예보는 끝나고 사회 면의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5년 차 베테랑 아이돌, Re:vale의 충격적 진실’… 누가 봐도 가십에 불과한 뉴스에 가쿠가 틱, TV를 꺼버렸다. 까매진 화면은 이제 가쿠만 비췄다.
그 까만 화면에서, 가쿠는 아까 전 본 화면을 겹쳐 봤다.
‘이 손가락, 비워 둘게.’
“반지라…….”
가쿠의 입에서 그런 힘없는 중얼거림이 튀어나왔다. 무심코 시선이 간 자신의 왼손 약지는 텅 비어 있었다.
다음에 야마토가 가쿠의 집에 묵으러 온 건 두 달 뒤였다. 이마저 빠르게 만난 축에 속했다. 뭐, 어떻게 보면 아이돌끼리의 만남이니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야마토는 가쿠의 집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무언가 다른 분위기를 눈치챘다. 사귀면서 가쿠의 한 가지 단점이라면 단점을 알아냈는데, 가쿠는 서프라이즈를 매우 못하는 편에 가까웠다. 그건 야마토가 눈치가 빨랐기에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었지만, 아무튼 그는 그런 거에 재주가 없다시피 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집 안에 감도는 묘한 분위기에 야마토가 동요하지 않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또 뭔가 꾸미나 보군.’
가쿠는 연애에 대한 로망이 있는 편이었다. 촬영하는 드라마나 영화들에 영향을 받은 게 아니라 기본적으로 22세의 남자가 가지고 있을 만한, 그런 로망들. 그중 서프라이즈도 하나에 들어갔다.
야마토는 가쿠가 주도했던 첫 서프라이즈의 기억을 떠올렸다. 너무 뻔하게 차려입고 나온 가쿠, 어디로 가는지 훤히 보이는 루트, 그날은 고급 레스토랑에서 가쿠의 집 열쇠를 받았다. 덩달아 받고 나서 “반지도 아니고 고작 이거냐!!!” 비명을 질렀던 자신도 떠올렸다. 조금 부끄러운 기억이니, 야마토가 급하게 고개를 저어 생각을 지웠다.
“왜 그래, 니카이도?”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고개를 저으니 당연하게 이상하게 봤으니, 야마토가 또 이번엔 급하게 멈춰서 가쿠를 바라봤다. 몇 번이고 생각건대 잘생긴 얼굴이었다. 한 가지 단점은….
“니카이도, 눈 감아 봐.”
봐, 바로 이런 것이었다. 무드고 뭐고 없는데 바로 들어가는 돌직구 화법! 야마토가 질린다는 얼굴로 순순히 눈을 감았다.
그러자, 손가락 사이로 느껴지는 뜨거운 온기. 그 온기가 조금 간지럽기도 했다.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야마토가 눈을 뜨기 전에 가쿠가 “자, 이제 됐어.” 멋들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야마토가 찔끔찔끔 눈을 뜨기 시작한 때엔, 이미 자기 손가락의 이변을 감지한 뒤였다.
“…반지?”
제 약지에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그것도 엄청 비싸 보이는 녀석이.
디자인은 단조롭다면 단조로웠다. 하지만, 야마토는 그 단조로움이 전부가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빛나는 은, 그리고 가운데에 박힌 아주 작은 큐빅 같은 보석. 야마토는 이 보석 하나가 들어가는 데 얼마가 드는지 기억했다. 왜냐하면, 야마토도…….
야마토의 머릿속에 저번에 참가한 방송이 스쳤다. 아, 설마. 근데 하필이면 이걸 지금, 진짜로? 야마토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저번에 방송에서 이런 거 원한다고 했잖아.”
“야오토메 군은 그 이야기, 진담으로 생각한 거야?”
“언젠가는 필요하다고 생각했어. 사이즈가 맞아서 다행이네.”
아직 풀지 않은 손가락매듭에 힘을 꽉 준 가쿠가 야마토의 손을 제 앞까지 쭉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쪽, 짧게 반지 위로 입을 맞췄다. 그 애정은 반지에 쓴 돈보다 더 값어치가 있는 것이었다.
야마토가 얼떨결에 마주한 손에 힘을 따라 쥐였다. 연결된 손과 다른 쪽 손에도 마찬가지로 약지에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같은 디자인의, 같은 보석이 박힌, 누가 봐도 커플링이란 걸 티 내는 반지.
…곤란해, 심각하게 곤란했다. 바지 주머니 안에서 존재감을 내뿜고 있는 ‘이것’은 어떡하지. 야마토가 식은땀을 흘렸다.
“오늘도 자고 갈 거지?”
“응. 내일 일찍 나가긴 하지만, 너만 괜찮다면.”
“난 늘 환영이야.”
가쿠가 맑게 웃자, 야마토가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전등 아래라 그런지 평소보다 얼굴이 더 밝게 빛나는 듯 보였다. 야오토메 가쿠는 늘 이런 사람이었기도 했지만.
“넌 가끔 얼굴이 흉기라는 걸 자각하지 못해.”
“너야말로 가끔 이상한 소리를 하더라.”
느슨하게 또 웃은 가쿠는 익숙하게 부엌으로 들어갔다. “저녁 아직 안 먹었지? 대충 만들어 줄 테니까.” 앞치마를 메는 모습조차 이젠 일상이었다. 손가락에 낀 반지만 빼면.
아, 진짜 어떡한담. 야마토가 웃는 얼굴을 유지한 채 식탁에 앉으면서 가쿠에겐 들키지 않도록 푹 숨을 뱉었다.
가쿠가 눈을 떴을 때, 야마토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일찍 나간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는지 같이 잔 침대의 온기는 남아있었지만, 그 온기의 주인은 사라졌다. 가쿠가 조금 아쉬움을 느끼며 아직 잔온이 있는 시트 위를 팔로 슥 훑었다.
그때, 무언가 평소랑 다른 점을 깨달았다.
잠이 화들짝 깬 가쿠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급히 제 왼손을 확인했다. 정확히는 왼손 약지였다.
거기에는 반지가 있었다. 그러니까, 자신이 준비하지 않은… 다른 반지가.
그 반지는 되도록 심플한 디자인을 고집하려 했는지 큐빅 같은 보석은 없는, 한 번 꼬여져 있는 링이 전부였다. 그러나 반지의 은빛이 침실 전등에 비추어져 그 어떤 보석보다 밝게 빛났다. 가쿠는 이 반지를 끼워 놓고 간 사람이 누구인지 알았다. 모를 수 없었다.
반지를 잠깐 감상하던 가쿠가 이번에는 침대 옆 책상을 찾았다. 거기엔 생각한 대로 쪽지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어제 끼고 잤던 자기가 맞췄던 큐빅이 달린 제 몫의 반지도. 쪽지는 야마토가 쓴 것이다.
[바보 야오토메. 커플링 정도는 사전에 말하고 맞추라고.]
“그러는 너도 말하지 않았으면서.”
피식 웃은 가쿠가 이어지는 작은 글씨를 더 읽었다.
[뭐, 내 거는 보석보다 더 값진 게 새겨져 있으니까 봐주라.]
가쿠가 의아해하며 슬쩍 왼손 약지에서 반지를 빼냈다. 그러자, 안쪽에 새겨져 있는 이니셜이 눈에 들어왔다.
G. Y.
이것이 누구의 이니셜인지는 안 봐도 뻔했다.
가쿠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미소를 지울 새도 없이 다시 반지를 쭉 끼워 넣었다. 아침에 나간 야마토도 지금 이 반지를 끼고 있을 테였다. G. Y. 가 새겨진, 자신과 똑같은 반지를.
그걸 생각하기만 해도 그저 기뻐서.
“나, 니카이도 너무 좋아하잖아.”
가쿠가 그런 중얼거림을 터뜨리곤, 빈 침실에서 혼자 웃었다. 아직 옆의 침대엔 온기가 남아있는 채다.
그 온기를 왼손으로 쓱 한 번 훑고는, 가쿠가 씩 웃었다.
“좋아! 오늘도 힘낼까.”
침실을 나가기 위해 힘차게 걸어가는 발걸음에는 이미 즐거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